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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일대로 일제히 쳐 올라온다는 꽃 소식을 일거에 사기극으로 만든 대설주의보는 그러나 그리 오래 주둔하지 못했다. 밤새 잔뜩 찌푸리며 적지 않은 눈을 뿌린 눈구름은 이 아침 동해상으로 슬며시 물러갔다는 소식이다. 작가 이제하가 훑고 지난 지 20여 년이 넘은 길 위를 나선 또 다른 나그네에게 길은 봄과 겨울이 혼재된 조금은 야릇한 모습이었다.

▲ 영화 '나그네는…' 스틸 컷
ⓒ 최삼경
누군가 길 위에 있는 사람을 무어라 부르는가? 하는 난센스 퀴즈를 낸 적이 있다. 나는 고민 고민하다가 '행인行人'이란 답을 내었으나 답은 도인道人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있는 도인 혹은 도사와 다름없다.

나그네가 길에서 맞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람, 만남, 죽음, 분단, 실향, 오구굿…. 문단에서는 누구도 이 소설을 제대로 비평해내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인간에게 놓인 길의 무상함이나 목적지 모름 때문은 아니었을까? 20여 년 전, 홍천~양양 간 도로는 그야말로 굽이굽이, 구절양장의 '강원도 길'이었다. 그 길이 이제 4차선 도로로 윤곽을 드러내며, 새 길로 단장되고 있었으니 이것은 시간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길이겠다.

이 작품은 동명의 제목으로 이장호 감독, 이보희·김명곤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잔잔한 감동을 주었는데 아마 '길'에 관한 최고의 영화로는 1954년에 발표된 페데리코 펠리니의 작품이 아닐까 한다. 잠파노(안소니 퀸),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라는 작중 인물들은 인류의 냉혹과 광기라는 공통된 삶의 단면과 슬픔을 보여줌으로써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성공했다.

▲ 눈 사이로 보이는 봄의 소식
ⓒ 최삼경
그렇지만, 거기에서도 길에 대한 어떠한 모범답안이 제시되지는 않았다. 단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놓인 길의 단면을 몇 가지 제시할 뿐이다. 수천수만의 길에서 우리는 종내는 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수험생의 모습들로 남는 것일지 모른다.

저 남쪽 섬진강 부근에서는 봄꽃의 개화가 한창이라는 꽃소식이 날마다 코끝을 간질이지만, 3월 막바지 강원도 길에는 잔설이 난분분하다. 이것이 강원도 땅의 우악스러움일 터이지만, 엄동의 이 땅에도 어느덧 새싹이 밀어 올려지고, 저 산들이 치마단처럼 부풀어 오르니 이것은 또한 계절이 만들어내는 봄의 길이겠다.

이젠 시골에서도 보기 어렵게 된 미루나무가 줄지은 신작로나 오솔길은 상상 속에서나 있는 모양이다. 요사이의 길은 대도시에서 보듯 실 꾸러미처럼 엉키고 뭉친 도심의 길이나, 위압적인 위용으로 속도를 목적으로 하는 고속행 도로들이 우후죽순처럼 뻗어난다. 길도 이제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놓이니 이것은 또한 인류의 필요가 만들어내는 문명의 길이겠다.

"콰르르 하고 배 밑창으로 썰물 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눈 덮인 맞은 편 산봉 위로 거대한 손바닥 하나가 걸렸다.


▲ 신흥사에서 바라본 설악산
ⓒ 최삼경
길은 언제나 그 길의 쾌적함보다는 질곡의 폭이나 예상치 못함으로써 그 길을 걸어온 사람의 크기를 가늠해 왔다. 슬픔을 모르는 자 인생을 논하지 말라란 말이 그럴듯하게, 때 없이 대설주의보가 발령되는 오색령, 지금의 한계령 정상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원통을 지나면서 연세 지긋한 마을 노인들로부터 '월산'이란 동네는 못 들어 봤고 '월학'이라는 곳이 서화 쪽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작중 노인이 그리워하던 고향은 아무래도 삼팔선 이북에 놓인 듯하다.

서울, 양양, 속초, 원통, 인제….

월산에 가고 싶다는 노인, 그 노인을 안내하는 간호사, 아무런 이유 없이 그 길에 휘말리는 나그네. 나그네에게 길은 육로로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그것이 물길이어도 하늘길이어도 걸음을 늦추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길은 마음속에도 확연하게 씨줄 날줄로 깊게 패는 것이어서 늦은 밤에도 오롯이 깨어있는 물고기처럼 끝내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길 위에 있는 나그네는 언제쯤이나 다리 편히 뻗고 누울 수 있을 것인가. 죽음? 죽음이 이 고단한 여정의 종착역이 될 수 있을까. 소설 말미에는 망자의 소원이나 원한을 풀어주고 죄업을 씻어 극락 천도를 기원하는 의식을 핑계로 망자의 영혼을 불러내어 오구굿을 벌이는 지경까지 나오니 편안한 휴식은 어쩌면 이 지상엔 없을지 모른다. 결국 '나그네'는 놓인 길을 언제까지고 걸어야 하는 운명으로 내동댕이쳐 진 존재다.

▲ 인제 가는 길
ⓒ 최삼경
소설이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길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 생명 받은 모든 존재들의 여로는 계산할 수 없는 억만 겁의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여여하게 남을는지 모른다. 강을 보고, 산을 보고, 바다를 보고, 바람을, 비를, 눈을 맞으며 걷는 정처 없는 나그네의 운명을 보고 돌아오는 길 위에 이제 슬며시 해가 비친다. '그래도 살아라!'는 메시지는 이렇게 밝고 따뜻하게 전달된다. 어쨌거나 부지런히 살아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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