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드디어 만났습니다. 지난 기사에서 썼듯이 전화 한 통이 2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내게 왔다면, 지난 주말의 만남은 20여 년 전의 시공간에 내가 있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얼굴에는 세월의 훈장과도 같은 주름살이 깊게 패인 선임도 있었지만 함께 만난 시간부터 우리는 적어도 20살 이상의 나이를 까먹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이번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고 명령에 불만을 품지 않았습니다.

관련
기사
사진 속 '쫄병'들은 무엇하며 살고 있을까

백령도의 구석진 해안가에서 그리도 미웠고 때로는 사람 같이 생각하기도 싫었을 서로들이 처음으로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선임과 후임, 그 기수의 벽과 출신 환경의 다름을 모두 해소하고 이제야 혼연일치가 된 것이니 군복을 벗은 지 20여년만에 제대로 기합이 든 진정한 해병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암기사항이며 전술의 숙지에는 고문관이었던 우리들이 자신에게 지독한 증오의 대상이었던 선임들의 이름은 어찌 그리 줄줄이 기억하는지, 역시 기억이란 아픈 것을 더욱 오래도록 저장시키는 차별성이 뛰어난 능력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야, 하나도 안 변했슴니더.”
“안 변하긴, 너야 말로 그대로다. 누가 너 보고 40대라고 하겠냐, 안 그렇습니까?”
“햐! 근데 김선배님, 와 이리 늙었습니까? 그 때는 젤로 동안이었는데.”
“먹고 살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변해버리데.”
“그나저나 임선배, 여기 선배가 말한 성질 더러븐 작전하사 있네예.”
“맞다, 이선배 각오하고 나왔지요. 오늘 함 나한테 당해보소.”
“아이구, 야, 내가 뭐 감정 있어 그랬냐. 군바리라는 것이 다 그렇지.”
“무신 소리, 인간성 더러븐 것은 사실이지? 낄낄, 농담이요.”
“그랬지요.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예.”
“그 바람에 기합 몽창 빠진 나 땜시 졸라 고로왔던 서선배도 여기 있네. 지금도 내가 미우요?”
“밉기는, 그래도 같은 쫄병끼리 서로 위안이 되던 때도 많았잖아.”


20여 년만에 만난 백령도 해당화 중대 시절의 전우들, 동안이었던 얼굴이 온데간데 없는 선임도 있고 여전히 20대 같은 후임도 있고...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20대 때의 얼굴로 다가올 뿐이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20여 년만에 만난 백령도 해당화 중대 시절의 전우들, 동안이었던 얼굴이 온데간데 없는 선임도 있고 여전히 20대 같은 후임도 있고...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20대 때의 얼굴로 다가올 뿐이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 임흥재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습니다. 삼겹살에 소주가 곁들여진 조촐한 주안상이지만 스무 살 해병으로 돌아간 우리들에게는 더없이 풍성한 진수성찬입니다. 백령도의 우리들에게 소주는 늘 4홉들이 큰 병이었습니다. 아마도 작은 병으로는 다 채우지 못할 그 시절의 설움과 애증과 고민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주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어쩌다 주계(해병대는 취사장을 그렇게 불렀습니다)에서 싸구려 어묵 소시지라도 슬쩍 하는 날이면 그날은 대박이 터진 날이었지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안주는 고추장에 마른 멸치 그리고 라면 국물이었습니다. 선임들의 눈을 피해 해안가 포상 한 구석에 판초의(우의)를 깔아 놓고 술판을 벌일 수 있는 시간이래야 저녁 근무도 끝이 나고 다들 잠 속에 빠진 새벽시간뿐이었지요. 그것도 아주 가끔, 가뭄에 콩 나듯 주어지는 천운이 있어야 가능했었으니까요. 그 시간에 쫄병들끼리 수통컵에 쓰디 쓴 소주를 철철 넘치게 따라 놓고는 우리는 안주처럼, 아니 안주보다 더 맛나게 선임들을 씹어댔습니다. 술은 달기만 하였지요. 지옥 같은 쫄따구 생활이 더욱 고약했으니 술이 쓸 리 없었습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내 씹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참석하지 못한 그들이 우리의 안주가 되었습니다. 안주라고 다 같을 수는 없어서 역시 맛나고 즐겨 찾는 메뉴는 따로 있나봅니다. 누구의 입에서나 뱉어지는 이름이 단연 최고의 안주인 것이지요. 그 중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내가 제대한 후 부임한 선임 중에 악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선임의 기행담을 들으면서는 그 중 제일 빨랐던 저의 제대를 속으로 축복하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안주들이 오르내리고 그 안주들이 우리의 혀 안에서 알콜과 섞여 목 안으로 넘어가는 맛에 우리는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끄러운 일행의 소란에 눈살을 찌푸리던 옆 테이블의 손님들도 이내 우리의 사정을 눈치 챈 듯 대단한 인내심으로 참아 넘겨주었습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도 심심한 사의를 속으로만 표하며 우리는 중구난방 좌충우돌하며 적게는 2년여 많게는 수년 동안의 백령도 해당화 시절의 추억 속으로 잠겨 들었습니다. 누군가 부르기 시작한 '백령엘레지'란 사제 군가를 너도 나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아직도 저런 노래의 가사를 잊지 않고 있다니 제게는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였지요. 참석한 사람 중에 아직도 현역으로 남아 있는 맨 아래 후임의 선창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그 막돼먹은 군가가 우리에게는 어떤 성가보다 아름답고 은혜 충만한 그런 노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고달픈 백령도의 일상을 잊게 해주는 자장가였으며 납득되지 않는 군생활의 애환에 함께 울어주던 정겨운 친구의 다독거림이었고 거짓으로 위장한 해병대의 전설을 자랑하던 휴가철의 증거 같은 것이었지요.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 ” 해병 곤조가를 자랑스럽게 부르던 그 시절이 어쩌면 가장 불우한 젊음이었고 또 한 편으로는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젊음은 또는 이 땅의 젊은이로 군역에 봉사하던 시절은 내가 태어난 조국이 가진 모순을 그대로 체험하고 증명하고 그래서 절망하면서, 끝내 극복하지 못했으면서 극복하고 나온 것인 양 기억의 저편에 묻어버린 바로 그 모순의 현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만난 우리가 한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난 시절의 그리움 속에서만 취해가다 헤어진 것은 바로 그 때의 한계가 남아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월을 잊고 그동안의 시간을 집안 깊숙이 감추고 나왔을지라도 우리의 무의식은 스스로 그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영위한 많은 흔적들을 챙기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 시간의 덮개가 내려 앉아 있는 우리의 얼굴 이면에 남아 있는 잔상들이 그것을 슬쩍 보여주다 이내 사라집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나 혹은 감추고 싶은 어떤 것과는 다릅니다. 어쩌면 바로 드러내기 어려운 그 사람만의 고유한 시간의 자국 같은 것이기도 하고 살아온 이력이 풍기는 독특한 냄새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취기가 올라 벌게진 얼굴에서 지난 시간의 흔적들이 엿보인다. 저렇게 편안해진 얼굴로 함께 했던 젊음이었으면 오히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 않았으리라.
취기가 올라 벌게진 얼굴에서 지난 시간의 흔적들이 엿보인다. 저렇게 편안해진 얼굴로 함께 했던 젊음이었으면 오히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 않았으리라. ⓒ 임흥재
그것을 몰래 훔쳐보는 즐거움에 저는 행복하였습니다. 아마도 다른 전우들도 제게서 그런 흔적들을 찾아내고는 내심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웃고 떠들고 마시며, 그야말로 통음난무 교우난장의 밤은 깊어 갔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우리의 젊음이 마냥 빛나지만은 않았던 것을 알았던지 하늘은 적당히 찌푸려 있었고 간간히 비를 뿌리며 우리의 추억을 적셔주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위대한 야유처럼 군대는 진정으로 밤에 이루어지고 낮에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 것에 틀림이 없듯 우리는 밤이라 해서 잠들 수 없었습니다. 백령도의 술판보다 딱 한 가지 좋았던 것은 끝내야 하는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것과 아침과 함께 시작해야 할 과업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양껏 마시고 졸린 혹은 취한 순서대로 자리에 누우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임과 후임을 갈랐던 이층 침상은 아니었으니 더 없이 황홀한 밤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어둠이 빛을 수태하듯이 아침이 되면 우리들은 바로 20살의 나이를 단박에 먹어야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쉬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마셔대는 시간 속에서도 결국 아침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갈, 백령도에서 집으로 이제는 거꾸로 된 귀대의 시간이 우리 앞에 놓였습니다. 어제의 그 아름답던 젊음에 생활이라는 현실의 모자가 씌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제 다 말해버린 입이 할 수 있는 말이란 “잘 살어, 건강하고 담에 다시 만납시다”가 전부였습니다. 서로 마주 잡은 손아귀에서는 진한 아쉬움이 땀으로 흥건하였지요. “필승, 해당화 중대 하사관, 집으로 귀대를 명 받았습니다. 필승!” 현역으로 남아 있는 막내 후임의 익살스런 귀대신고에 우리는 웃으며 각자의 거처를 향해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돌아오는 내 가슴 속에서는 그리움이, 20해 동안의 시간을 까먹도록 명 받았던 그 그리운 시간이 더욱 사무치게 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귀대의 명을 어기고 탈영하고 싶었습니다. 기차의 적당한 움직임 속에서 나는 끝내 귀대의 명을 어기고 백령도의 세찬 바람 속에서 파도를 응시하고 있었지요. 그렇게 서럽던 내가 아니라 이제야 어엿한 해병이 되어 해무 속에 감추어진 북녘의 땅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기차가 종착역에 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안녕, 해병 하사 아무개, 안녕, 나의 전우들이여!”

덧붙이는 글 | 지난 기사 <사진 속의 쫄병들은 ~ >에 이어지는 기사입니다.

*백령도 해당화 중대에 함께 근무했던 전우들은 위 기자의 메일을 이용해 연락 바랍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