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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금실 전법무부장관.
ⓒ 오마이뉴스 이종호
강금실 전 장관은 간혹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기는 나이에 가정환경이 편치 않았다"는 정도로만 자신의 가족사를 표현하며 말을 아껴왔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제주 4·3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는 정도만 회자됐지 정확한 실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강 전 장관은 5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 사건이 나의 어린 시절이나 우리 집안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며 오래된 얘기를 차분하게 꺼냈다.

- 노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선 처음으로 지난 3일 제주 4·3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했다. 제주도 출신으로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워낙 무고한 사람들이 많았다. 제주에선 4·3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얽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 떠올리기 싫은 얘기일 수도 있는데, 강 전 장관의 아버지가 '유지(有志) 사건'의 대표적인 희생자였던 것으로 안다.
"일반적으로 좌익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강계돈씨)는 전쟁 중인 1952년도에 법정투쟁을 통해 대구고법 항소심에서 스스로 무죄를 받아내셨다. 그런데 제가 30대 때인 1980년도인가 제주도에서 제주역사백서를 냈는데,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봤더니 무죄판결난 것은 빠지고 '잡혀갔다, 체포됐다, 기소됐다'까지만 나와있었다. 아버지 스스로 찾아다니면서 '고쳐내라, 고쳐내라' 하니까 정오표(正誤表)를 붙여줬다. 비로소 '무죄로 판결났다'고 기록된 것이다. 소설가 현길언씨가 제 아버지 사건을 소재로 <정오표>란 단편소설을 썼다.

제주 '유지사건'이란?

1950년 8월 초순 제주지역 법원장, 검사장, 제주읍장 및 변호사, 사업가, 교육자 등 16명의 지역유지급 인사들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는 혐의로 제주지역 계엄사령부로 연행된 사건.

결국 이 사건은 계엄사령부(제주도 해병대 정보참모실)가 용공조작한 사건임이 밝혀졌지만 제주도 내 레드콤플렉스를 더욱 심화시켰다.
무죄판결을 받고 교육자 신분이 다시 회복되었지만 제주도로 돌아가지 않고 경주, 밀양 쪽에서 교육 생활을 하셨다. 아버지를 볼 때면 '왜 저렇게 한을 품고 계실까, 몇십년씩 갈 필요가 있나, 풀고 가시지' 그렇게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아버지가 참 대단한 분이셨다. 그때가 한국전쟁 때였는데 무슨 재판이 되었겠나. 그런데 부산으로 끌려가서 2년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본인이 싸워서 무죄를 얻었다는 것은 대단한 집념이었다. 스스로 자주권을 행사하신 것이다.

두 가지였다. 아버지는 성품에서 대단하다. 틀렸을 땐 끝까지 싸우신다. 그 때 아버지가 포기했으면 어땠을까. 또 하나는 어떤 문제가 부당하게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 법적인 구제 장치만 갖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무죄를 받았다고 한들 이미 삶이 뿌리채 바뀌어버렸는데….

ⓒ 오마이뉴스 이종호
우리 가족은 그 사건으로 제주도를 떠났다. 땅도 상당히 갖고 있었는데 옥살이 한 번으로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 사건이 우리 집안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저의 어린 시절이나….

아버지께서 부산에 끌려갔을 때의 신분이 교감선생님이었다. 그 때는 대학교가 없었을 때였으니까 '제주농고'가 곧 제주의 서울대학교이고, 교감이면 총장에 가까운 분이었다. 그런데 사람들 보는 앞에서 포승에 묶여 항구까지 끌려가셨다. 그것에 한이 맺히셨다. 그래서 다시 고향에 못 가신 거다. 이미 사람들은 무죄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이 맺힐 수밖에 없었던 거다.

사람이 사람을 참 많이 다치게 한다. 사회나 역사가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아주 없을 수 없겠지만, 좀더 줄어들게 만들어서 편안한 사회를 꿈꾸는 것이 아닐까. 우리 아버지는 음악 선생님, 바이올린 음악 선생님이었다. 제주여중 교가를 지으셨다.(옆에 앉아 있던 조광희 변호사(대변인)는 '아버지가 음악 선생님이었다는 건 저도 처음 듣는 얘기네요'라고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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