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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후 3시 30분 플로리다 올랜도 코로니얼 드라이브에서 벌어진 '반이민법' 철폐 시위에서 히스패닉 시위대원들이 트럭을 몰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트럭 앞부분 격문에 영문과 스페인어로 "우리는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글귀가 쓰여져 있다.
9일 오후 3시 30분 플로리다 올랜도 코로니얼 드라이브에서 벌어진 '반이민법' 철폐 시위에서 히스패닉 시위대원들이 트럭을 몰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트럭 앞부분 격문에 영문과 스페인어로 "우리는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글귀가 쓰여져 있다. ⓒ 김명곤
"흑인과 백인은 이 나라에서 자신들을 위한 혁명을 했고 각각 그들의 '마틴 루터 킹'이 있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가 되었다."

이는 지난달 25일(미 현지시각)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벌어진 '반이민법' 철회 촉구 시위에서 히스패닉 청년이 'AP통신' 기자에게 내뱉은 말이다. 그가 "이제는 우리의 차례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현재 미국 내에서 뜨거운 감자가 된 1200만 명의 불법체류자(아래 불체자) 문제가 생계 차원을 넘은 '인권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인권문제'는 필연적으로 미국사회의 '법질서'와 충돌할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지금 미국사회는 한바탕 진통을 겪고 있다.

최근 50만 명 이상이 운집한 캘리포니아 시위를 비롯 콜로라도, 텍사스, 노스캐롤라이나, 위스콘신 등 미 전역에서 벌어진 반이민법 철회 시위는 베트남전 반전시위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록됐을 정도.

오는 10일(현지시각) 로스앤젤레스 등 전국 140개 도시에서 벌어질 동시다발 대규모 시위를 앞두고 9일에도 플로리다 등 일부 도시에서 수십만 명이 반이민법 철회 시위를 벌였다. 약 3천여 명이 모인 올랜도 시위에는 히스패닉계 노동자들이 대거 참가했다. 시위대는 "우리는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에서 살고 있다, 조금 늦게 이 땅에 왔을 뿐, 우리도 이민자다" "불법적인 인간은 없다, 부시는 물러가라" 등을 외쳤다.

이번 시위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학생들의 시위참여다. 지난달 말에는 LA 지역의 고등학교 중 6개교 이상의 6만여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포기하고 시위에 참가해 당국을 긴장시키기도 했으며, 9일 올랜도 시위에도 상당수의 중고등학생이 동참했다.

학생들의 시위참가와 관련, 캘리포니아 대학 정책연구센터(CPRC) 소장 안드레스 지메네즈는 <엘에이 타임스> 31일자에서 "그들은 현재의 이민법 개정 토론에서 부모들이 겪고 있는 고충과 불만을 감지하게 된 게 분명하다"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가족이 미국사회에서 '문제집단'이 되고 있는 데 대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이민노동자들은 왜 시위에 나섰나

시위대원들이 "부시는 물러가라"(Bush Step Down)는 글귀가 적힌 격문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시위대원들이 "부시는 물러가라"(Bush Step Down)는 글귀가 적힌 격문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 김명곤
이번 시위의 직접적인 원인은 지난해 12월 16일 미 하원이 통과시킨 밀입국자들과 불체자들의 목을 조여 온 '반이민법' 때문이다.

센센브레너 하원 법사 위원장이 주도해 일명 '센센브레너 법'으로 불리고 있는 이 이민법안(HR 4437)은 밀입국자들의 유입을 막기 위해 미 남부 접경지역 2300마일 중 700마일에 장벽을 건축한다는 내용과, 불체자를 중범죄로 다스리고 고용주는 물론 불체자에 도움을 주는 친지, 이민단체, 성직자들까지 처벌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미국 내 불체자는 12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일반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건축업이나 농장노동, 호텔, 식당 등 서비스 업종, 청소업 등 낮은 급료의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퓨 히스패닉 리서치 센터 자료에 따르면, 불체자 가운데 700만 명이 어딘가에 고용되어 일을 하고 있으며 이들이 미국 노동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9%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일반 노동자들이 꺼리는 농장노동력의 24%, 건설노동력의 20%, 청소업의 17%, 호텔 식당 등 서비스업의 17%, 식품업의 12%가 불체 노동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자들이 극히 꺼리는 지붕공사 노동자들의 29%, 도살장 노동력의 27%가 불체자로 구성되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불체자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경우 상당수 업종이 도산하게 되고, 이들의 일부가 수개월 동안 귀국해 노동 시장에 구멍이 생길 경우 물가가 폭등하는 등 미국 경제에 대혼란을 가져 올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이 같은 우려에도 미 의회가 '반이민법'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9.11테러 이후 '안보'에 대한 국민적 관심 때문이다. 센센브레너 법안이 '악법 중의 악법'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세를 얻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떠나면 누가 당신들의 노예가 될 것인가?"(Who will be your slaves when we are gone?)라는 시니컬한 내용의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는 시위대원들.
"우리가 떠나면 누가 당신들의 노예가 될 것인가?"(Who will be your slaves when we are gone?)라는 시니컬한 내용의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는 시위대원들. ⓒ 김명곤
경제 우선이냐, 안보 우선이냐 ... 고민에 빠진 미국

빌 프리스트 공화당 상원 대표는 30일 <에이피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우선적 의무는 불체자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면서 "도대체 그들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서 머물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같은 언급은 2001년 9.11 이후 미국사회의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도 줄지 않았음을 대변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경제도 살리고 안보도 튼튼히 하는' 묘안을 먼저 내놓은 사람은 부시 대통령이다. 2004년 초 재선 캠페인에 들어선 부시는 이라크전 문제가 불거지면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이 같은 상황에서 히스패닉 표를 얻기 위해 일명 '게스트 워커'(임시노동자)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그는 텍사스 주지사 시절에도 고용자들과 이민자들의 요구에 부응한 임시노동자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역설해 히스패닉을 비롯한 소수인종의 환심을 샀다.

부시 대통령이 제안한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의 골자는 불법이민자들에게 벌금을 지불하게 하고 3년 동안의 임시 노동허가를 준다는 것이다. 이 노동허가는 한 차례에 걸쳐 3년 연장을 허용해 6년간 합법 체류가 가능하지만, 그 이후에는 고국으로 돌아가 최소한 1년간 머문 다음 다시 취업비자를 신청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부시의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은 이민 옹호, 이민제한 그룹 모두로부터 실효성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왔다. 불체자 노동력 비중이 높은 건축업 및 농장, 식당 등 서비스 업종은 불체자들이 3~4개월 정도만 본국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업무가 마비돼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게 뻔하기 때문. 더구나 다시 비자를 받는다는 보장도 없이 1년간 본국에 머물 불체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과 학업중인 자녀를 미국에 두고 귀국해 취업신청을 할 경우 현재의 이민 문호 상태에서는 평균 6~7년을 기다려야 하는 점도 큰 장애물이다.

이에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와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부시의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을 다소 변형한 또 다른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제안했다. '케네디-매케인 법안'은 국경 강화 조치와 함께 불체자들이 임시 노동비자를 받고 6년간 계속해서 취업한 경우 미국 내에서 영주권 및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으로, 부시가 내놓은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보다 더욱 '친이민적' 성격을 띠고 있다.

결국, 상원 법사위는 마감을 하루 앞둔 지난달 27일 논란 끝에 12대 6으로 케네디-매케인 프로그램을 뼈대로 한 법사위 법안으로 통과시켰다. 찬성한 12명 중에는 4명의 공화당원과 8명의 민주당원이 포함되어 있고, 반대자 6명은 모두 공화당 의원들이었다.

그러나 임시노동 비자를 받은 노동자들에게 귀국하지 않고 영주권 획득을 거쳐 시민권을 신청할 기회를 준다는 법사위 조항은 즉각 정치권의 반발을 불러왔다.

히스패닉계 농장 노동자 대표가 나와 '반이민법' 철폐를 외치며 연설하고 있다. 입고 있는 셔츠에 '농장 노동자들을 위한 정의' (Justice for Farmworkers)라는 문귀가 보인다.
히스패닉계 농장 노동자 대표가 나와 '반이민법' 철폐를 외치며 연설하고 있다. 입고 있는 셔츠에 '농장 노동자들을 위한 정의' (Justice for Farmworkers)라는 문귀가 보인다. ⓒ 김명곤
공화-민주 할 것 없이 의원들도 오락가락

이민법 개정에 대한 공화당의 입장은 민주당에 비해 훨씬 강경하다. 공화당은 이민법을 '법과 질서'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다루려고 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국경 보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부분의 공화당 의원은 불체자들에게 시민권 신청 자격을 부여하는 것 등 어떤 형태의 사면에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법사위 표결 결과에서 보듯 이민법 개정에 대한 공화당 입장이 통일돼 있지 않은데다 이를 주도하고 있는 지도급 의원들 간에 첨예한 입장 차를 보이고 있다. 알렌 스펙터 공화당 법사위원장이 케네디-매케인 법안을 옹호하는 반면, 프리스트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반이민법에 찬성하고 있다는 게 좋은 예.

국경을 강화시키면서 동시에 불체자들을 풀어주는 이민법안을 추진해 온 민주당은 대체로 케네디-매케인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을 찬성하는 등 공화당에 비해 유연한 이민정책을 선호하고 있으나 당내 의견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는 공화당과 마찬가지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불체 노동력이 오히려 저임금을 조장하는 등 노동시장을 피폐화하고 있다며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을 반대하고 있으며, 또 일부는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이 의회에서 통과될 경우 공화당의 인기가 상승해 11월 의회 선거에서 오히려 민주당에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부시 대통령은 지난 29일 캔쿤에서 빈센트 폭스 멕시코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법사위 법안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상태.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형태의 법안이 새 이민법안으로 확정될 것인가. 아직 이에 대해 예측은 시기상조다. 상원 법사위 안은 4월 초에 상원에서 본격적으로 토의에 들어간 상태이지만 일반 의원들의 반발이 커 상원 본회의 통과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와관련, 공화당 척 헤겔 의원과 멜 마르티네즈 의원은 또다른 형태의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이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은 미국에 5년 이상 머문 불체자들에게는 귀국 조건 없이 임시 노동비자를 주는 반면, 2~5년 된 불체자들은 일단 미국 밖으로 나가 임시노동비자를 신청하게 하고, 2년 이하의 불체자들이나 밀입국자들은 본국으로 추방한다는 안이다.

그러나 친 이민 의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은 상태. 실제 척 헤겔-마르티네즈 안은 지난 주 상원의 테스트 투표 결과 저조한 성적을 기록해 본회의 상정조차 보류됐다.

"불법적인 인간은 없다"(No Human is illegal)는 뜻의 격문을 들고 행진하고 있는 시위대원들.
"불법적인 인간은 없다"(No Human is illegal)는 뜻의 격문을 들고 행진하고 있는 시위대원들. ⓒ 김명곤
새 이민법안, 어떤 내용으로 확정될까

상원은 23일까지 부활절 휴회에 들어간 후 재협상에 들어갈 예정이지만 다른 안건들이 산적해 있어 쉽지 않다. 일부 미국 언론들은 의회 소식통들의 말을 빌려 11월 중간선거 이후에나 결말이 날 것으로 점치고 있다.

현재로서는 상당수 하원의원이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불체자들에게 시민권을 신청할 자격을 주는 어떤 법안에도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있어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또한 멕시코 접경지역에 장벽을 건설하는 안도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여론이 세를 더해 가고 있지만 하원이 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어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최소한 지난해 하원에서 통과된 센센브레너 법안 중 '불체자=중범죄자' 조항은 최종 법안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재 상당수의 친공화당 성향의 기업들조차 공화당이 반이민법안을 계속 추진한다면 다가올 의회선거와 대선에서 공화당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반이민법 조항의 삽입에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미국민 56%, 불체자 합법 비자 찬성

미국민들의 과반수는 불체자들에게 합법 비자를 주자는 의견에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에이피통신>과 '입소스'가 3일 발표한 여론조사(표본수 1003명, 조사의 오차한계 ±3.1%) 결과에 따르면, 미국민들의 56%는 불체자들에게 합법비자를 발급하는 의견에 찬성했다. 특히 18세에서 34세의 젊은 층은 66%, 대졸 이상 고학력 소지자의 50%가 불체자 합법비자를 찬성했다.

정당별로 보면, 민주당원의 62%가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을 찬성한 반면, 공화당원의 52%만이 이에 찬성을 표했다.

또 이번 조사에서는 미국민의 80%는 불체자들이 미국 노동자들이 원하지 않은 직종에서 일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미국내 불체자들이 미국 사회를 위해 이득을 주는 존재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가령 미국민들의 51%는 불체자들이 미국사회를 위해 긍정적으로 공헌하고 있다고 답한 반면 42%는 불체자들이 미국사회를 피폐화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특히 응답자의 51%는 불법입국 및 불체 상태가 경범죄라고 본 반면 47%는 중범죄라고 보았다.

한편 미국민의 3분의 2는 멕시코 접경지역에 장벽을 건설하는 것이 불체자들의 유입을 막는데 큰 도움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더구나 부시 대통령의 인기가 하락할 대로 하락해 잔뜩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공화당이 미국 인구의 13~15%에 이른다는 히스패닉계의 표를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악법조항의 누락을 점치는 이유다.

현재 이민법 전문가들은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이 어떤 형태로든 상원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지만, 이 경우 마지막까지 논란 가능성이 큰 것은 불체자의 귀국 여부와 국경 장벽 건설 여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상원이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을 비롯, 어떤 형태의 법안이든 새 법안을 확정 통과시키면 상하 양원의 주요 입안자들이 상원의 법안과 지난해 통과된 하원의 법안을 놓고 협상에 들어가게 된다. 그야말로 새 이민법 제정은 험로를 통과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인권 및 종교 그룹, 소수민족 그룹 등 미국 내 친 이민 그룹들은 오는 10일을 '전국적인 행동의 날'로 지정하고 다시 대규모의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미 의회 내의 반이민 의원들이 이들의 불만과 친이민 의원들의 공세에 어떤 결말을 도출해 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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