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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명 삼존천불비상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 국립공주박물관
새로 생긴 공주박물관(고마 나루)에 가면 2층 유물전시실에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13년(673년)에 제작된 계유명 삼존천불비상(癸酉銘 三尊千佛碑像, 국보 108호)이 의연한 자태로 놓여있다.

이 삼존천불비상은 총 높이 91cm, 몸높이 71cm, 폭 47.5cm, 본존 높이 38.5cm의 규모로 되어 있다. 이 비상은 크게 천개(天蓋)와 삼존상(三尊像)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운데에 삼존이 양각되어 안치되어 있고, 그 좌우에 시대와 제작인원, 기원에 대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 삼존불 좌상을 중심으로 앞면과 옆면, 뒷면 작은 불상으로 가득차 있어 모두 920여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비상의 양편에 있는 조상기에는 명문은 각 4행씩 글이 새겨져 있는데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세재 계유년4월15일(歲在 癸酉年 四月 十五日) 대사 진모 씨(大舍眞牟氏) 등 이백오십명이 국왕(國王)과 대신(大臣), 칠세부모(七世父母) 등을 위하여 아미타불과 여러 불상들을 만든다는 글의 내용이 적혀있다.

백제 유민 250명이 망국의한 달래기 위해 제작

백제가 661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부여성이 함락되고, 공주 웅진성에서 의자왕이 잡혀 많은 백제인들과 함께 인질이 되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잡혀간 지 1년이 되었다.

백제 무왕의 조카이고 의자왕의 사촌동생인 복신장군과 도침은 일본으로 망명한 왕자 풍을 왕으로 내세우고, 당나라와 신라가 나당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하
는 틈을 타 주료성을 근거로 본격적인 재건 운동을 시작했다.

복신은 옹산성과 사정성, 진현성 등을 공격하여 탈환하고 신라군의 금강 상류를 통하여 내려보내는 군량을 차단하여 나당연합군이 한때 곤경에 빠트렸다. 사비성까지 쳐들어가는 성과를 냈으나,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를 급히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전세가 불리하자, 복신의 백제 재건(부흥)군은 임존성으로 후퇴하고 격문을 수차례 내걸어 백제유민의 호응을 얻음으로써 여러 차례 나당연합군을 격퇴시켰다. 복신과 도침이 반목하여 복신은 도침을 죽이는 한편 부여 풍까지 제거하여 실권을 장악하려다, 이 사실을 안 풍이 군사를 이끌고 복신을 죽여 4년여만의 백제재건운동은 내분으로 좌절된다.

이에 흩어진 백제유민들은 연기 지역에서 숨어 살며 망국의 한을 풀길이 없자, 백제가 멸망한 661년에서 13년이 지난 673년에 계유명 삼존천불비상을 제작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출토에 얽힌 이야기

올 3월 말 아이들과 함께 공주박물관에 들렀는데 40여년 전 중학교 다닐 때 본 불비상이 그 자태 그대로 있었다. 이 불상의 출토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도록을 구입했지만 도록에는 출도에 얽힌 이야기는 없고, 박물관장과 전문위원에게 물어도 출토 경위를 알지 못했다.

단지 출토 지역이 연기 비암사라고 되어 있었으나, 인터넷과 전문가에게 확인 결과 조치원 서광암으로 고쳐야 한다고 했다. 국립 공주박물관에서 발간한 도록이 잘못 기록됐다는 것. 박물관 역시 이를 인정했다.

그때 문득 30여년 전, 필자가 중학교 1학년 시절 인근 학교인 공주 영명중학교 현백미술 선생이 학생3-4명을 데리고 박물관 관람을 하며 각 유물마다 출토에 대한 얽힌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옆에서 듣던 생각이 났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대략적인 내용은 "조치원 근방 어느 초가집 암자에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시주를 가신 어머니 스님이 폭우가 쏟아져 비를 피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낙숫물에 땅이 패여 부처님 얼굴이 나타났다"는 것.

어머니 스님은 그 길로 절에 돌아와 아들에게 어느 곳에 가면 부처님이 고생하고 계시니 지게를 지고 가 모셔오라고 했다. 그 아들은 두 말 하지 않고 수십 리의 밤길을 달려 돌부처를 모셔와 좌대를 만들어 마당에 잘 모셔 놨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고고학계 교수 등이 찾아가 확인한 결과, 이 부처상이 범상치 않은 것을 확인하고 보고하여 국보로 지정되어 소장자는 높은 국고보상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현백 선생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 효도를 하면 복이 굴러온다"는 내용의 말씀과 더불어 "국보가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이 부모의 말씀을 공경했기 때문이라"는 교훈을 전해주셨다.

나도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며 뿌듯한 느낌을 받았다.

출토에 대해 수소문 한 끝에 문헌을 찾아보니 61년 당시 천불비상을 보러 서광암에 갔던 황수용 교수(동행 진태섭교수, 정명호)가 쓴 <충남 연기 석상조사>라는 책 속에 조사 경위가 나와 있었다.

황 교수는 61년 7월 29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고물상 박물당을 우연히 들렀다가 고물 중개인 이근태씨 외 1인과 대화를 나누다 서광암의 석상 소재를 탐지했단다. 2일 후인 31일 황 교수 등 세 사람이 이 석상을 보고 나서 환희와 만족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서광암은 조치원 내창(서창동1구)이 부락에 있는 초가집 암자로 이인천(당시 75세, 여) 스님과 그의 아들 안승규(당시 54세) 모자 2인이 살고 있었다. 불상의 발견 장소를 추궁하니 51년 3-4월경 동란의 폭격을 받은 조치원 시장 하수도에서 이 석상은 석교로 사용되고 있던 중 이런 사실을 남신도가 전하자 읍내에서 이곳까지 운반하여 5백나한이라고 불렀다.

이 석상은 1차조사 후 문교부에서 응급책으로 국보로 가지정 되었고, 61년 9월 4일 보존위원회에서 정식으로 국보지정이 의결되어 새로운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재정리 되어 국보10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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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충청지역에서 노동분야와 사회분야 취재를 10여년동안해왔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빠른소식을 전할수 있는게기가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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