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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놓은 지 얼마나 되었소?”

“사흘이에요.”

“그 동안 나를 찾아 온 사람은 없었소?”

“없었어요.”

몽화는 대답을 하다말고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어제 오전에 저쪽 전각 하나에 맹주께서 걸라고 한 천과 비슷한 것이 걸려 있었어요. 흰색 천에 검은 글씨로 령(嶺) 자를 쓴 천이었는데 하루가 지나자 보이지 않더군요.”

그 말에 담천의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 의미는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아마 백결은 자신이 걸어 놓은 천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음은 그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는 의미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자신을 부르는 령(嶺) 자의 천을 걸어놓았다는 사실이었고, 그것은 그가 죽거나 상대의 수중에 들어가 있지 않고 잇다는 점이었다. 다만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했다.

허나 담천의가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또 한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바로 남궁산산이었다. 하자(霞字)와 령자(嶺字)의 의미가 이제 무엇인지 깨달았던 까닭이었다. 애써 자신의 마음을 속이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송하령은 남궁산산에게 있어 벽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철벽과 같았다. 그녀가 가로막고 있는 한 자신의 마음은 영원히 가슴 속에만 묻어 두어야 한다. 그 사실을 알리 없는 담천의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몽화를 보며 물었다.

“모든 상황을 정리하면 우리가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은 것 같소?”

몽화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스스로도 가늠하기 쉽지 않다. 더구나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 확실하게 대답한 것도 무리다.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저들의 공격이 없다면 길어야 보름 정도.... 공격이 있거나 다른 일이 벌어진다면 저 역시 장담할 수 없어요.”

몽화의 판단은 정확해서 구효기가 거들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구양휘가 나서서 장담할 수도 없는 일. 모두 애써 감추려 하고 있지만 불안한 기색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 허나 정작 담천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안에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든지 저들과 승부를 보던지 해야겠구려.”

결론은 간단했다. 그것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뚜렷한 방법이 없을 뿐이다.

“.........?”

몽화가 그렇게 쉽게 말한 담천의의 내심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담천의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어차피 상황이 절망적이라면 무언가 발버둥은 쳐봐야 하지 않겠소? 어차피 나는 입구가 막혔음에도 들어왔고, 들어왔다는 것은 또 나갈 수 있다는 것 아니겠소?”

그렇지 않아도 그 하나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던 몽화였다. 담천의는 과연 나갈 방도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오히려 어리둥절하는 사이 담천의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계신 분들 중 각 문파나 세가의 수장 분들은 오늘 저녁 모두 모이라 하시오.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의 머리 속에서 나온 생각보다는 나을 것이오.”

“알았어요.”

“그리고 당신은 나와 많은 이야기를 하여야 할 것 같소. 당신이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과 내가 확인하고 싶은 내용은 같소.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조각을 맞춰간다면 분명 이 상황을 정확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나는 아직 궁금한 것이 많소.”


어두운 밤이었다. 뎅그러니 걸린 조각달만이 전각의 윤곽을 가늠하게 해주었다. 헌데 미세한 소리와 함께 전각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의 한쪽이 밀리며 조그만 구멍이 보였다. 아주 좁은 구멍처럼 보였지만 그곳에서는 슬며시 인영이 나타났고 주위를 몹시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몸을 벽에 붙여 어둠 속에 숨으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멍에서는 곧 이어 또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나타내며 밀려나온 기단을 밀자 구멍은 감쪽같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먼저 나온 인물은 백결이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전각의 모퉁이를 돌아 빠르게 옆 전각 쪽으로 움직였다. 빠른데다가 어둠이 짙어 누군가 그곳을 자세히 본다 하더라도 발견해 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시 또 전각의 벽에 바싹 붙어 움직이던 백결은 전각의 모서리에 다가서자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전각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경계를 하는 인물들을 파악하는 듯 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갑자기 시선을 고정시킨 채 몸이 굳었다. 전각의 처마 밑에 걸터앉아 자신을 주시하는 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나타났군. 이번에는 그냥 보내지는 않아....!”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하얀 선. 나직하게 말을 한 우상은 웃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전각 벽에 붙어있는 백결을 향해 내리 꽂혔다. 그것은 흡사 야조(夜鳥)와 같이 양 팔을 꺽은 채 인영의 목과 어깨를 짓눌러 가는 듯 했다.

백결은 갑작스런 우상의 출현에 놀란 듯 몸이 굳어 버린 것 같았다. 허나 우상이 백결의 어깨를 잡아채려는 순간 백결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빠르게 몸을 회전시켜 옆으로 비켜나갔다.

파파팍!

허공을 가른 우상의 손이 스치자 벽이 부서지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상의 몸은 허공에서 방향을 틀며 다시 백결의 허리를 잡아채 갔다. 백결이 상체는 지면에 댄 채로 두 발을 맹렬하게 교차시키며 차올렸다.

“한번 당하면 됐지.... 두 번은 쉽지 않아...”

백결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록 아직 몸이 완전치는 않지만 두 번 다시 망신은 당하기 싫었다. 더구나 이런 모습은 매가 꿩을 잡아채 가는 상황과 흡사했다. 매의 날카로운 공격에 꿩이 방어하는 수단은 두 가지다. 무작정 도망치면서 머리만 수풀 속으로 처박는 것과 이렇게 배를 보이며 두 발로 차올리는 것. 가끔 매 역시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다.

퍼퍽! 타닥!

맹렬한 백결의 대항에도 우상의 움직임은 전혀 멈춤이 없었다. 그는 백결의 발과 부닥침과 동시에 백결의 발을 비껴내면서 우수로 백결의 아랫배를 잡아채는 듯 했다. 백결이 황급히 몸을 옆으로 굴렸다.

찌이익!

백결의 옆구리 쪽 옷이 찢겨져 나갔다. 역시 우상은 백결이 상대할 인물이 아니었다. 백결이 몸을 옆으로 굴리며 지면에서 몸을 튕기며 일어서는 순간 빠르게 따라붙은 우상의 쌍수가 다시 백결의 양 어깨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몇 수 교환도 해보지 못한 채 또 다시 제압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백결의 어깨 뒤로 난데없이 두 개의 손이 나타나 우상의 쌍수와 마주쳐가는 것이 아닌가?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갑자기 불쑥 땅에서 솟아오른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츠파파팍!

네 개의 손이 마주치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위의 공기가 찢어질 듯 파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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