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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보이는창
얼마 전에 도서출판 '삶이보이는창'에서 나온 <지리산-고라니에게 길을 묻다>는 이른바 포토포엠에세이다. 책 겉표지에 그렇게 씌어져 있다. 그러니까 지리산과 그 산자락 주변을 담은 사진과 시, 에세이가 책 한 권에 함께 자리해 있다.

사진은 사진작가 이돈기씨가 찍었다. 그는 1964년 전남 순천 출생으로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삼성궁> <선암사> <강> <사람의 바다> 등의 사진집을 낸 우리 시대 중견 사진작가이다.

그리고 시와 에세이는 1956년 전북 임실 출생으로 1985년 <남민시> 창립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사과꽃 편지>와 <당몰샘>이라는 두 권의 시집을 펴낸 박두규 시인이 썼다. 그는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순천지부장이며, 여순사건순천시민연대 사무총장 일을 보고 있다.

<지리산-고라니에게 길을 묻다>는 지리산 자락 임실과 순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두규 시인과 이돈기 사진작가의 우리 근현대사의 피투성이 산, 지리산에 대한 애절하고도 순결한 헌사(獻詞)다.

책의 구성은 크게 ▲1부 푸른 대답 ▲2부 그리움의 흔적을 찾아 능선을 넘다 ▲3부 언젠가 저 산을 품어야 하리 ▲4부 아직도 흐르지 못한 세월이여 ▲5부 스스로 고향이 되어야 하리 등 다섯 꼭지로 나뉘어져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리.
말없이 이루어야 하리. 침묵해야 하리. 저 산처럼
세상의 모든 말들을 버리고 소리 없는 대답을 보내야 하리.
묻지 않아도 늘 푸른 대답을 보내오는 저 산처럼. - 1부 15

상선암으로 해서 차일봉을 오르다 멧돼지 네 식구를 만났다. S 곡선을 돌아 갑자기 조우했는데 나도 놀랐지만 그 가족들이 더 놀랐던 것 같다. 그들이 먼저 순간적으로 등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갔는데 그 찰나에 마주친 멧돼지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마 그녀도 그럴 것이다. - 2부 13

죽음은 삶의 마지막 과정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살면서 생일이며 졸업이며 결혼기념도 많은 준비를 하며 맞는데
生에 처음이자 마지막 행사, 어쩌면 가장 중요한 행사일지도 모르는
스스로의 죽음을 맞기 위해서는 참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우선 그 두려움을 버리는 것부터 그리고 생일처럼 즐거운 일이 되는 데까지. - 3부 15


책의 앞쪽 어느 한 부분을 읽어본 것들이다.

책의 1부, 2부, 3부는 저자가 현재 지리산 아랫녘 순천에 살면서 갖게 된 단상과 지리산을 찾아가면서 본 풍광과 그 느낌을 적고 있다. 책 속에는 80여 컷의 지리산 풍광을 담고 있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작가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편안하다. 그의 사진 프레임(frame)은 권위적이지 않고, 사방으로 열려 있다. 그래서 박 시인의 지리산에 대한 간절한 말씀들을 오롯이 다 담아내고 또 그 말씀들을 지리산으로 되돌려보내는 듯하다.

인용한 3부 15의 글 옆에 실려 있는 103쪽 사진 작품은 시적이고 철학적이다. 단풍으로 물든 산비탈의 잡목림 아래 동그마니 서 있는 한 기의 부도탑은 독자에게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의 근원적인 의문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박 시인이 이 책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지리산 빨치산들의 눈물겨운 삶을 노래한 4부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리산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애달프고 서러운 목숨들의 역사를 안게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백골들이 녹슨 총열과 함께 묻혀 있고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묻혀 있는 산이다. 역사를 바르게 사는 일이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는 일이며, 생명들의 삶과 평화를 헌납해야 하는 일인가. 역사 속에서 바르게 서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이토록 참혹한 일인이어야만 하는가. 사상과 이념을 떠나서 역사라는 진실한 시간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것인가.

지리산은 그 모든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말이 없으나 늘 푸른 대답을 스스로 보내오는 지리산, 그 모든 것을 품어내고 삭여내어 새 살을 만들어내는 지리산, 바로 생명의 산이며 우리가 찾아야 할 산이다."


여기에 이 책을 쓰게 된 취지와 저자의 세계관이 다 담겨져 있다.

박 시인은 현재 순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참교사로, 민족문학작가회의 시인으로, 여순사건순천시민연대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지리산 자락에 묻혀있는 역사적 사건 찾아내어 우리 시대에 그 의미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지난 역사의 상처로 남아있는 지리산을 바르게 알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미래의 바른 삶을 가져오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이후 지리산의 역사는 절반이 빨치산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빨치산의 역사는 아직도 살아 있는 역사다. 만델라가 27년 옥살이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30년 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빨치산들이 수두룩하였다. - 4부 1

그 시절, 해방된 조국을 그들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싸웠던 사람들은 모두 수배자가 되어 지리산으로 들어와 파르티잔이 되었고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또 인민군들과 좌익세력들이 퇴각하며 들어와 합류하였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견딜 수 없어 올라온 노인도, 어린 조카도, 남편을 찾아 올라온 아내도, 아내 등에 업힌 간난아이도, 산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모두가 빨치산이 되었다. - 4부 3


4부의 이 글들을 읽으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 깊은 한숨과 슬픔이 울컥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 한 맺힌 수많은 사람들의 넋들은 다 어찌 하는가? 우리 땅에 서려있는 원한을 풀어내고자 생명평화탁발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도법스님의 '발문'을 다시 읽으며 어설픈 내 독후감을 끝맺는다.

"지리산을 그리워하고 지리산을 이야기하는 박두규 시인의 크고 따뜻한 가슴이 오늘 우리 모두의 크고 따뜻한 가슴으로 빛나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들의 생명, 우리들의 역사, 우리들의 삶이 아름다운 인연으로 꽃 피워질 것이다."

지리산 - 포토포엠에세이, 고라니에게 길을 묻다

박두규 글, 이돈기 사진, 삶창(삶이보이는창)(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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