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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농업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은 우리 땅, 기후에 맞는 수천여 종의 우리 곡식 종자를 거친 할머니의 손끝에서 어머니에게로 물려주었다.

우리 종자가 낳은 곡식은 식량으로서 사용되는 것은 물론 수많은 성분과 서로 다른 특성을 지녀 생약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각종 식품의 원료로 소비되고 있으며 미래를 함께 할 자원이다. 더욱이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종자 유전자 확보에 나서고 있는 요즘, 우리 종자는 자손만대에 물려줄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다.

전국을 돌며 토종종자 250여종 수집

▲ 전통잡곡종자보존전시포
ⓒ 허정균
▲ 토종잡곡종자발아실험장.
ⓒ 허정균
그러나 경제 개발과 농산물 수입개방으로 우리 종자는 국민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으며 급기야 종자주권마저 외국의 거대 자본으로 넘어가 우리 농업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또 농약에 찌든 외국산 농산물의 범람으로 국민 건강마저 크게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토종 종자의 중요성을 깨닫고 조·콩·수수 등 250여 종의 토종종자를 수집하여 이를 널리 퍼뜨리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원주시 신림농협 김규동(62) 조합장이 바로 그다.

4월 18일 그를 찾았다. 원주시 신림 농협 객장 안에 들어서자 조·수수·옥수수 등을 이용해 만든 대형 장식물이 눈길을 끌었다. 사무실에는 한쪽 벽면은 장식장으로 되어있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북심이차조·몽당조·개발실조·까치수수·눈까메기콩·갓끈동부 등등 처음 들어보는 우리 토종 종자의 이름표를 단 유리병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모두 150여 종이 이 안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가 토종종자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93년부터였다. 당시 서울에선 전국의 특산물이 참여하는 풍물장터가 열렸고 신림 농협에서는 여기에 조 이삭 끝에 어른 수염처럼 털이 나있는 '어른조'를 출품했으나 풍물장터 측에서 색깔이 이상하다며 수입조라고 우기는 바람에 쫓겨나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 토종 종자임을 재차 확인한 그는 이후 우리 잡곡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맘을 먹게 되었고 전국을 돌며 토종 종자 수집에 나섰다.

"주로 시골의 5일장을 찾았습니다. 시장 한편에 좌판을 벌여 놓은 할머니에게 우리 토종이 숨어있었습니다. 전남 여수에서는 종자 한 알에 500원씩 사기도 했고 제주도까지 돌았습니다. 100여종은 이런 방식으로 수집했으나 그 이상은 늘지 않았어요. 갈수록 시골 장터에서도 수입품종이 판을 치더군요."

"시골 장터에서도 수입품종이... 이 땅의 잡곡이 약곡인데"

▲ 원주시 신림면 신림농협 객장 안의 조, 수수, 옥수수 등 잡곡을 이용한 장식물.
ⓒ 허정균
수원 농업진흥청에 수백가지의 우리 종자가 있지만 쉽게 내놓지 않는다고 전한다. 유전자 관리 차원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곡 위주의 정책 속에서 잡곡은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 잡곡의 우수성에 눈을 돌려야 한다"며 "잡곡은 약곡"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수천년 동안 우리 땅에 적응한 우리 잡곡은 약곡입니다. 정월 보름이면 오곡밥을 먹는데 이는 우리 신체의 5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곡이란 찹쌀·팥·기장·검은콩·수수를 말하는데 찹쌀은 폐, 팥은 신장, 기장은 위장, 검은콩은 신장에 좋고 수수는 귀신을 쫓아낸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간을 보하는 산나물을 곁들인다.

김 조합장은 옛날엔 대보름날 오곡밥을 지어 세 성씨 이상 나누어 먹었다며 오곡밥 예찬론을 편다. 우리 조상들이 중병을 앓은 후 원기 회복을 위해 먹었던 밥이 오곡밥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창안하여 그는 찹쌀·차좁쌀·서리태·팥·흑미·대추 등 잡곡에 약재 등을 섞어 '원주기(氣)밥'을 만들었다. 원주기밥 전문점은 단구동의 1호점에 이어 인천과 대구에도 있다.

그는 전국에 이런 식당을 점차 늘려가며 우리 잡곡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나갈 계획이다. 또한 수입밀로 만든 피자가 식탁을 점령해버린 사실을 개탄하며 공주대와의 협력으로 우리밀과 우리 잡곡으로 피자를 만드는 일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김 조합장의 노력으로 신림면에서 나오는 오곡밥 세트는 인기가 높다. 이 덕분에 올해에도 조합원들과 원주 인근에서 가장 높은 가격에 장려금 얼마를 더해 전량 수매하기로 계약했다. 시래기·피마자·산채나물까지도 일일이 배분하여 계약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우리 땅에서 나는 모든 먹거리 종자가 다 명품이다.

1992년 그가 처음으로 조합장을 맡은 이래 신림농협은 계속 흑자운영을 하고 있으며 조합원들의 자녀가 대학에 진학할 경우 누구에게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게 최근 진행되고 있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를 꺼내자 한숨만 쉰다.

잡곡에 약재를 섞어면 원주기밥

▲ 김규동 신림농협 조합장. 잡곡을 이용한 화분(곡분)이 눈에 띈다.
ⓒ 허정균
"농부는 굶어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종자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는 애써 수집한 소중한 토종 종자를 보전하고 널리 보급하기 위해 1994년도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에 1500평 규모로 30여종의 품종을 입식하여 전통잡곡종자보존전시포를 설치했다.

2000년에는 원주시 신림면 신림리 소재 중앙 고속도로변에 4500평 규모에 품종도 67종으로 확대했다. 2001년부터는 기존운영전시포 4500평, 희귀잡곡보존전시포 1000평, 종자가 서로 닮는 현상을 막기 위한 영농회 분산운영전시포 3000평, 종자 유실방지를 위한 전시포 1500평 등 총 10000평을 운영하고 있다.

품종수는 벼과 74종·콩과 67종·유지작물 12종·마디풀과 6종·박과 3종·무궁화과 3종·가지과 2종 등 모두 200여 종에 이른다.

그는 이처럼 보존한 종자를 널리 나누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전국에서 소식을 듣고 종자를 얻으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무료로 종자를 나누어 주고 있다. 이날도 전북 부안에서 찾아온 한 농부와 우리 잡곡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신림농협에서는 매년 10월 10일을 잡곡의 날로 정하고 잡곡 전시포에서 '잡곡축제'를 열고 있다.

"진짜 토종 종자, 자연발아로 가려낼 터"

2002년에는 관련 학계와 연대하여 '우리잡곡살리기운동본부'(www.woorijabgok.co.kr)를 결성했다. 이 단체를 통해 학자들과 토종 종자에 관해 세미나를 여는 등 교류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데, 최근 한 가지 커다란 실험을 시작하였다. 순수한 토종을 가려내겠다는 것이다.

▲ 전통잡곡종자보존전시포 전오철 관리소장. 200여종의 잡곡종자의 관리, 재배, 분배 등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허정균
토종유전자원은 한반도의 자연환경에서 보전되어 온 '재래종 또는 토산종'으로, 오랜 기간 재배되어 다른 지방의 가축이나 작물 따위와 교배되는 일 없이 그 지방의 풍토에 알맞게 된 종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토종 종자는 잡초보다도 더 생명력이 강하여 잡초 속에서도 자연 발아를 한다는 것이 김 조합장의 설명이다.

"조가 강아지풀에서 나왔어요. 강아지풀은 군락을 형성하지요? 어느 종자든지 2세를 위해 좋은 여건을 형성해놓고 죽는데 자연 상태에서 그냥 두면 조도 자신의 후손을 위해 강아지풀처럼 군락을 형성할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응용하여 진짜 토종을 발굴하겠다는 것이 김 조합장의 의지이다. 작년 5월에 땅을 1m 정도 파고 자연상태의 흙을 옮겨왔다. 그 위에 하우스를 짓고 철망을 둘렀다. 동물의 접근을 차단한 것이다. 이렇게 마련한 100여 평의 공간에 지난해 12월 2일 그가 수집한 모든 토종 잡곡종자를 땅에 묻지 않고 뿌려 두었다. 자연발아를 기다리는 것이다. 5년 후에 싹이 트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덧붙이는 글 | <부안21>에도 송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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