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는 기업의 미래?
한 TV 광고에서 흐르는 감미로운 팝송 'Try to remember'가 시청자의 시선을 당긴다. 감성적인 외모의 중년 남녀가 건물 회전문에서 엇갈리며 서로 힐긋 쳐다본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마주치는 남녀 같은데 여자는 남자를 단번에 알아보건만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건물 앞에 세워놓은 차를 타고 떠나 버린다. 모델들의 표정 연기만으로 족했던 이 광고에 차분한 여자의 독백이 깔린다.
"참 많이 변한 당신, 멋지게 사셨군요!"
영화 같은 이 장면은 얼마 전 TV 황금 시간대에 시청자들을 잠시나마 로맨틱 무드에 잠기게 했던 현대자동차 그랜저의 광고다. 사실 자동차의 브랜드 보다 옛 사랑의 추억을 더 기억하게 하는 이 광고는 역설적인 고품격 전략을 발휘해 시청자들의 가슴에 다가왔다.
광고주 측은 <코리아 애드 타임즈>에서 이 광고의 기획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현대인에게 자동차는 이동수단만이 아닌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의 수단이다. 대형차 소유자라고 하면 흔히 성공하고 돈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당당하고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어하는 것이 그랜저를 타는 사람들의 내재된 인사이트였고… 오랜 회의 끝에 결정된 광고…."
자동차가 현대인에게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면, 현대인에게 자동차는 예술이라고 해석해도 그리 문제 될 게 없을 것이다. 하긴 마샬 맥루한은 현대인에게 자동차는 우리 신체의 일부인 '다리의 연장'이라고 했으니 오역적인 직역을 하자면 현대인에게 자동차가 없다면 장애인(?)인 셈이다.(그러나 내 주변에는 생활필수품이라 하는 TV와 휴대전화 그리고 자동차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며 느리고 불편한 삶을 자초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그들은 '장애인'들이다.)
광고의 콘셉트는 근사했다. 광고 기획자 측은 그랜저의 이미지에 '돈만 많은 사람이 타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고 멋진 인생을 살면서 돈도 많은 사람이 탄다'라는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그러나 광고의 전형적인 속성처럼 잠시 비친 이 자동차 광고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방치해 온 내재된 인사이트를 가리기엔 한계가 있음을 이내 드러낸다.
사회 환원에 일조하지 못하는 1조
4월 19일, 현대 기아 자동차의 '1조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대국민 사과문을 접한 국민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어떤 네티즌들은 한 칼럼니스트의 표현처럼 '국민을 앵벌이로 아냐?'며 분노하기도 했다.
삼성과 론스타의 여론무마용 기부형식에 이은 현대 자동차의 대응에 대해 - 현대의 기부액이 삼성보다 2000억 높게 책정된 액수임에도 - 여론이 잠잠해지기는커녕 기부문화 왜곡이라는 비판만 난무한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기부는 '어떤 일을 도울 목적으로 재물을 내어 놓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대의 현 상황은 어떤 일을 도울 때가 아니라 자신을 도울 때다. 기부 이전에 비정규직 노조원들에게 다가가거나 현대 계열사와 납품업계 노조의 주장대로 '납품업체에 줄 돈이나 제대로 챙겨주면 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부는 '자발적인 동기'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만약 기부가 '부득이한 선택'이 된다면 이는 곧 우리 사회의 기부 문화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권력에 의한 강압적 기부나 사회 환원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1조원은 기부가 아니라 '자의적인 벌금'으로 해석해야 할까? 1조 원이 만약 '자의적인 벌금'이라면, 그 전제는 대기업들이 불법으로 축적한 사재의 '퇴행적인 기부'로 사건이 무마될 경우에 유효하다.
하지만 검찰은 사회적 환원과 무관하게 수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으니 1조의 명분을 국민 위로금 조로 해석하는 게 무난한데, 문제는 국민이 '문제의 1조'로 위로받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참여연대에 따르면 현대 자동차의 해결사로 등장한 1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출처가 정 회장 부자의 사재가 아니라 현대 자동차, 기아 자동차, 그리고 현대 모비스의 사업 기회를 편취, 배임해 획득해서 만든 글로비스의 지분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당연히 현대차 3사에 돌아가야 할 돈이다.
게다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1조의 글로비스 주식에서 이런저런 거품이 다 빠지고 보면 실제로 정회장 부자의 기부금액은 30억에 불과하다는 주장(글로비스가 50억 원을 투자해 만든 회사이기 때문에, 지분의 60%(정몽구 부자의 지분량)는 30억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이야기) 나돌고 있으니 이렇게 소비자를 우롱하는 과대 포장에 국민은 1조로 위로받기는커녕 위화감만 더 쌓여간다.
현대 기아 자동차에는 예술가(?)가 없다!
그동안 현대 자동차는 성능 좋은 자동차를 다량 생산하고 수출해서 한국의 효자기업으로서 입지뿐 아니라 자동차 생산업체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어제의 효자기업이 오늘의 문제 기업이 되어야 하는지 이 광경을 지켜보는 국민도 피의자만큼이나 속이 상한다. 그리고 국민의 반응은 이제 분노에서 일종의 냉소적인 식상함으로까지 바뀌고 있다.
생뚱맞게도 필자는 그 원인을 현대 기아 자동차에는 예술가(?)가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 결과 이번 검찰수사 사건과 관련해 현대 기아 자동차는 기업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장면들을 언론을 통해 내보내고 말았다. 그들은 '관객들이 한번은 속아도 두 번은 안 속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검찰의 현대 자동차 수사 발표 직후 있었던 정 회장의 출국 장면은 (불과 얼마 전 삼성회장에게서 본 듯했기에) 표절 논란이 일었고, '모세의 기적'(어느 네티즌의 표현대로)을 연상케 한 과잉 호위 장면은 관람자로 하여금 조폭영화를 떠올리게 했으며, 주연이 빠지고 조연들만 대거 무대에 등장한 '대국민 사과문'은 작품의 실제감을 떨어뜨렸다. 한마디로 전 근대적인 조직문화의 전형이었다.
내세울 점은 현대 기아 자동차 재벌부자, 임직원,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 하청 업체에서 글로비스 소액주주까지 최다 배우가 동원된 작품이었다는 것뿐이었다. 특히 피라미드 형태로 얽힌 이들의 관계에서 빚어진 '애증 문제'는 되풀이해서 봐도 눈이 시리다.
재벌과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에 임직원이라는 정규직 직원이 있지만 사실 그들은 장기적인 비정규직이 아닌가. 그럼에도 대기업의 조직에 몸이 개편되고 재벌의 과잉호위에 동원되어 취재진들과 비자금 규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몸싸움까지 감행하는 대목에서는 코끝이 찡할 만큼 절정이었다. 동시에 그 장면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신파극의 애증 장면이기도 했다.
관람자인 국민 눈에 비친 이번 현대 자동차의 대응책은 신선함이나 창의성이 부족했다. 그들이 기업을 살리려는 의지가 있다면 눈 가리고 아옹하는 제스처로 일관할 게 아니라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예술가적인 고민이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멋지게 사는 법
현대 자동차는 그랜저 광고를 통해서 소비자들에게 '인생을 멋지게 사는 법'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 지나간 사랑을 마주치더라도 (그랜저를 탄다면) '인생을 멋지게 산 남자'라는 시선을 받을 수 있다는 광고의 콘셉트는 이제까지 보아온 '성공한 CEO의 세단' 같은 중대형 승용차 광고와는 또 다른 차별화를 시도했던 것임은 맞다. 그런 점에서 현대 자동차 그랜저 광고는 새삼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되짚게 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 발표와 함께 드러난 현대 기아 자동차의 '성공한 남자'들의 사는 법은 광고 속의 현실, 아니 광고와 현실이라는 이분법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멋지게 사는 법! 다소 주관적인 듯한 이 평가 기준의 공통분모는 무엇보다도 삶의 결과보다 '과정'에 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은 축적된 결과나 성공보다 결과적으로 많은 것을 잃을지언정 과정에 충실하고 진실했기에 당당한 사람이 '인생을 더 멋지게 산 남자'다.
설령 그 남자가 그랜저를 못 타면 어떻겠는가! 그것보다는 '참 많이 변한 당신, 멋지게 사셨군요!' 그 한 마디가 더 귀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이제 국민은 대기업의 퇴행적 기부나 대국민 사과 같은 '눈 가리고 아옹' 하는 해프닝을 관람하기를 거부한다. 그보다는 엑스트라 역이라도 좋으니 대기업을 촉촉한 눈망울로 바라보며 "참 많이 변한 기업, 멋지게 경영하셨군요!"라는 독백을 하고 싶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