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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를 포함한 경남지역 YMCA 사무총장과 이사·이사장을 포함한 8명은 지난 4월 24일부터 30일까지 6박7일간 스리랑카 YMCA 평화순례를 마치고 돌아왔다. 우리가 도착하던 날도 테러가 발생하여 스리랑카 법무장관이 중상을 입고 정부군이 타밀반군지역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스리랑카 내전의 원인을 정리해 보았다. <편집자주>
사진 촬영을 금지해 멀리서 몰래 찍은 무장군인과 탱크
사진 촬영을 금지해 멀리서 몰래 찍은 무장군인과 탱크 ⓒ 강재규
스리랑카(Sri Lanka)는 실론(Ceylon), 셀렌디브(Serendib), 인도의 눈물(Teardrop of India), 빛나는 작은 섬(Resplendent Isle), 다르마 섬(Island of Dharma), 동양의 진주(Pearl of the Orient) 등으로 불리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나라이다.

공식 국가명은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 수도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현재와 과거가 용해되는 두시인 스리랑카의 남서해안에 위치한 콜롬보이다. 수도 콜롬보는 수세기동안 번성한 항구도시로서 상업, 금융, 쇼핑으로 유명하다. 인구는 약 1925만명, 북위 5-10도, 동경 82도에 위치하고 있어 연평균기온이 27도로 일년 내내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이다. 국토의 면적은 65,610㎢로 한반도의 약 3분의 1정도이다.

주요 민족으로는 싱할라족(Sinhalese 74%), 타밀족(Tamil 18%), 스리랑카 무어족(Sri Lanka Moor 7%), 버거족(Burger), 말라야족(Malay)으로 구성돼 있으며 주요 언어로는 싱할라어, 타밀어(공용어), 영어(통용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불교(69%), 힌두교(16%), 회교(7.6%), 기독교(7.5%)로 전 인구의 약 69%를 차지하는 불교는 대부분이 싱할라족이 믿고 있고, 전 인구의 16%를 차지하는 타밀족의 전통 종교인 힌두교는 북부와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섬으로 이뤄진 스리랑카는 인도 남동쪽으로 32km떨어져 있다. 1585km에 달하는 해안선을 가지고 있어 열대 해변, 역사 유적지, 우림, 화려한 폭포 등 멋진 경관으로 방문객을 매혹시킨다.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에는 ‘애덤스 브리지(Adam's Bridge)’로 불리는 징검다리와 같은 산호섬들이 50km의 좁은 포크해협(Palk Strait)을 이어주고 있다. 섬의 남부는 아름답고 무성한 산림이 형성되어 있고, 섬 북부는 남부산악지역에서 자프나(Jaffna) 반도까지 거대한 평지를 이루고, 2,524m의 피두루타라가라산(Mt. Pidurutalagala)이 스리랑카의 지붕을 이루고 있다.

스리랑카는 전형적인 농업 국가로 주식인 쌀은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이며 차, 코코넛, 천연고무 등이 주요 농산물로 경제적 근간이 된다. 특히 차밭이 만들어 내는 자연미는 스리랑카를 더욱 매력적이게 한다. GDP는 183억불(2003년도), 1인당 국민소득은 947불(2004년도)에 머물고 있다.

평화로운 나라에서 민족종교분쟁의 나라로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섬나라 스리랑카는 민족종교분쟁에 휘말려 있다. 제3세계 분쟁이 그러하듯 스리랑카 내전 역시 외국의 오랜 식민통치(443년)가 씨앗이 되었다. 이 나라는 1505-1658년 포르투갈, 1658-1796년 네델란드, 1796-1948년까지는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식민통치가 되기 전 이 섬에는 기원전 6세기에 인도 북부로부터 건너 온 싱할라족과 이보다 500년가량 늦은 기원전 1세기에 인도 남부 타밀 지방으로부터 건너와 북동부 쪽에 왕조를 세운 타밀족이 살아왔다.

문제는 1948년 영국이 스리랑카를 독립시키며 싱할라족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싱할라족 정부는 타밀어로 '실론'이라 부르던 국호를 ‘빛의 나라’라는 뜻의 싱할리어인 '스리랑카'로 바꿨다. 국기에도 자신들의 조상신화에 등장하는 사자 문양을 넣는 등 싱할라족만의 나라를 만들어 갔다.

본격적인 갈등은 1956년 찬드리카 현 대통령의 아버지인 반다라나이케 수상이 영어 대신 싱할라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부터 였다. 정부는 나아가 인구비례입학제를 도입해 타밀족에 대한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한했고, 1958년에는 토지소유권마저 박탈하였다. 타밀족들은 군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타밀족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타밀족들은 1977년 타밀연합해방전선을 만든 뒤 총선에서 18명의 의원을 스리랑카 의회에 보냈고, 1983년 총선에서도 16명을 당선시켰지만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종족간의 갈등은 1983년에 폭발했다. 스리랑카의 반군 단체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가 북부 자프나 지역에서 13명의 정부군을 살해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들의 시신이 콜롬보에서 공개되자 스리랑카 전역에서 반타밀 폭동이 벌어졌다. 스리랑카 보안군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폭동으로 콜롬보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타밀인들에 대한 폭력행위가 이어져 최소한 600명의 타밀 민간인이 죽었다. 폭도들은 타밀인을 때려 죽이거나 심지어 산 채로 태워죽이기까지 했다. 싱할라인들은 타밀인이 운영하는 상점과 주택을 불태웠고 여성들을 성폭행했다.

LTTE는 이 때부터 대규모 군사조직 건설에 착수하였다. 타밀인 5000여만 명이 살고 있는 인도남부 타밀나두주에 요원들을 보내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해외의 타밀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부군과 LTTE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

이와 같이 타밀 반군은 타밀의 분리 독립 운동을 표방하며 1970년에 만들어진 타밀학생연맹이 그 모태가 되었으며, 1980년대 중반 정치적 분리 독립 운동이 실패하자 LTTE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타밀인들의 거주지인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는 LTTE의 군사훈련기지 역할을 했다. 내전초기 LTTE는 군사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게릴라전과 테러로 스리랑카 정부군에 맞섰다. 소수 병력의 LTTE가 정부군에 맞설 수 있었던 데는 해외에 거주하는 타밀인들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1983년 인종폭동을 피해 유럽, 북미, 오스트레일리아로 간 타밀 지식인과 재력가들은 LTTE의 자금줄이었다. 이와 함께 지도자인 프라바라칸은 탁월한 군사전략으로 화력의 열세를 극복했다. 모병제에 따라 생계형 입대를 한, 가난한 농촌출신의 정부군과 달리 LTTE 군대는 타밀의 분리 독립이라는 확고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LTTE는 아직도 테러단체로 분류되고 있다. 실제 LTTE가 운용하는 자살공격부대 블랙타이거는 2001년 콜롬보 국제공항에 대한 자살폭탄공격으로 14대의 비행기를 폭파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스리랑카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싱할라족과 타밀족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정치, 경제, 사회적 격차를 제도적으로 줄이는 노력을 스리랑카 정부가 반드시 실현해야 하고, 관련 당사국인 인도의 입장도 스리랑카 내전 문제의 해결에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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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대 법학과 교수. 전공은 행정법, 지방자치법, 환경법. 주전공은 환경법. (전)한국지방자치법학회 회장, (전)한국공법학회부회장, (전)한국비교공법학회부회장, (전)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 (전)김해YMCA이사장, 지방분권경남연대상임대표, 생명나눔재단상임이사, 김해진영시민연대감나무상임대표, 홍조근정훈장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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