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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꽃 향기 떠도는 숲에서 나는 순이, 네 얼굴을 본다.
아카시아꽃 향기 떠도는 숲에서 나는 순이, 네 얼굴을 본다. ⓒ 황종원
봄이 언제 왔던가. 지금이 봄인가. 온 듯하면서 갔는가.

우면산에서 아카시아꽃 향기는 남실바람 타고 온 집안에 가득 찼을 때야 나는 꽃이 핀 것을 비로소 알았다. 발코니 너머 산은 백설이 내려앉았는가. 아카시아, 아카시아. 향기, 향기였다.

아카시아꽃은 내 청춘을 돌려준다. 방금 인 듯 꽃향기를 주며 떠난 이는 열여덟 순이었다. 눈앞에 아카시아꽃이 있듯이 순이 또한 이때면 꽃향기 속에서 다시 온다.

가난은 슬프다기보다 불편하였던 1964년도 봄, 우리는 고교2학년생이었다. 둘 다 상업고등학생들이었다. 함께 주산학원에 다니다 친해졌다.

러닝셔츠에다 교복 바지에 검정 운동화 차림으로 나는 수업을 끝내고 세검정 집에 가는 그 아이 옆에서 을지로 4가~청계 4가~종로 4가를 거쳐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었다.

그 때라고 옷 잘 입는 아이들이 없기야 할까. 여름 교복의 흰 깃이 눈부시고 칼날처럼 세워 입고 다니는 애들도 있었으나, 나는 한 벌의 교복으로 일주일 동안 입고 다니려니 아껴 입고 학교가 끝난 시간에는 교복을 벗은 러닝셔츠 차림이었으니, 수줍은 그 아이는 버젓한 차림이 아닌 남자와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사스러웠을까.

언젠가 불광동에서 그 아이의 집이 있는 세검정까지 가는 황톳길에 아카시아꽃이 가득할 때였다. 길가에 아카시아가 은하수처럼 하늘 천장 노릇을 하며 하늘과 땅 사이에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했다.

그때, 순이에게서는 꽃향기가 났다. 함께 걸으면 부딪치는 순이의 팔뚝에서도 향기를 풍겼다.

차가 지나갈 때야 어둠이 벗겨지던 세검천에도 아카시아꽃 향기가 떠돌았다.

나는 대학에 갔고, 순이는 제약회사 경리사원으로 취직을 하였다. 나는 순이의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가 있던 종로 4가의 길바닥에서 기다렸다.

때로는 초가을 차가운 밤 기운으로 조금은 소름 돋은 팔뚝끼리 부딪치면, 어찌 잊으랴. 그 때의 몸 저림을. 내 몸은 녹아서 그 아이의 그림자가 되는가 했다.

오고 가는 말 속에 우리는 어렵사리 본 영화 이야기나 음악 이야기를 하고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별빛처럼 영롱하게 새롭게 태어나곤 했는데.

우리는 때로는 말없이 걸었고, 때로는 너무 말이 많았다. 그 애를 세검정 가는 길목인 청와대 입구까지 바래다주며 나는 다시 밤길을 되잡아 집까지 숨이 턱에 닿게 가던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몸 저림이 남아 황홀한 기쁨도 어찌 한두 번이었겠는가.

순이가 직장을 바꾸었을 때는 출근 시간에 순이의 얼굴을 보려고 내 집 예관동에서 그 아이가 새로 옮긴 직장이 있는 성수동까지 가곤 했다.

그 때의 순이가 나를 살갑게 대해주지 않아도 나는 길바닥 장승같았다. 어쩌다 다투고 헤어지고 한 동안 뜸했다가 다시 만나고. 그러던 어느 날. 길가 집 내 방에서 보면 길 건너가 빤히 보이는 데 밤의 어둠 속에서 그 아이는 그믐달인 양 흐릿하게 떠 있는 듯이 있었다.

놀래서 나간 내게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제도, 그제도 왔었어. 너를 보고 있었어."

"부르지. 네 이름을 크게. 친구 이름 부르듯. 순아, 순아하고 말이야" 하고 어깨를 안으니 왜 그리 얇던지.

그 뒤 우리는 팔짱 끼고 을지로, 종로, 창경궁과 경복궁까지 걸었어도 지치지 않았다.

때로는 세운상가의 건물 그림자 속에서 거리의 네온사인을 비처럼 맞으며 밤을 지키면 그 애의 숨결은 꽃내음이었다.

아! 내게도 그런 한때가 있었던가. 차 한 잔 하는 사치를 하러 들어간 찻집에서는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가 흘러나오던 때였다.

대학 4학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우리는 함께 있었다. 친구들도 함께.

명동에서 을지로, 다시 서울 운동장을 지나 왕십리를 거쳐 사근동에서 시간은 자정을 넘어 긴 걸음에 지쳐 우리 셋은 방 하나를 얻었다.

사내 셋이 주머니를 털어 얻은 그 방에서 우리는 웃고 떠들면서 밤을 보내다가 밤이 이윽고 깊어 가자 그 아이는 잠이 들고, 사내 셋이 지키던 그 밤은 왜 그리 길어.

"너를 내 각시 삼겠다" 하던 내 맹세는 어둠 속에서 나 혼자 했던 고독하고 부질없는 맹세였지.

다음 날 아침. 그 아이를 바래다주면서 나는 종아리를 가리키며 "스타킹에 올이 나갔다"고 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왜 이제 말해?" 한다.

그 아이의 짜증만큼 내게는 스타킹 하나 사줄 여유가 없으니 가난은 슬프도록 불편한 것이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기에 그 아이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봄은 늘 그렇듯 겨울의 끝에 매달리듯 오다가 어느새 와 있는데 날아온 청첩장은 그 아이와 봄 석 달을 무심히 보낸 뒤였던가 보다.

메모가 달려 있으니, "그동안 고마웠어. 나, 시집가. 행복을 빌어줘."

고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의 세월과 졸업 후 1년 동안 만남과 헤어짐이 세월 속에서 날줄과 씨줄로 엮어져 있었건만. 우리는 이별의 인사를 청첩장과 메모 몇 줄로 하여야 한단 말이냐.

대학을 졸업한 나는 학군 소위가 되었고. 그때 순이는 결혼 적령기였다. 군 정복을 입고서 나는 아이를 찾아갔다. 결혼식 1주일 전이기도 했다. 세검정 개천가에서 길 건너에 번듯한 양옥으로 그 아이네는 집을 옮겨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하면서 야단치던 그 아이의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고 그 아이에게 나를 데려다주었다. 내가 데리고 갈 수 없으면 남이 데리고 갈 순이와 신접 살림살이가 방에 가득한 자리에서 나는 "잘 살아라, 행복하고 사랑 받고…" 했다. 목이 메었다.

지난 세월의 달콤함과 실연의 아픔을 왜 나만 가져야 하느냐 하고 따진들 무엇해. 이미 너무 늦었어.

수없이 손을 잡았던 아이, 한 겨울 내 코트로 감쌌던 따뜻한 네 체온이 이제 추억처럼 아스라하구나.

잘 가라. 다시 손을 잡을 일도 없이 나는 그 아이를 떠났다.

그 아이의 결혼식 날에 먼발치에서 나는 그 아이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았다. 이제 그 아이와 나와의 관계는 분명한 마침표를 찍었고, 한 번도 사랑한단 말이 없던 만남이었으나 어쩌는가.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 잘 살아라. 순아, 잘 살아라. 사랑했었다."

나는 한 번도 그 아이에게 못해본 말을 부질없이 혼자 했다. 세월은 무심해서 그 무너진 자취마다 내 생활은 다시 쌓여갔다.

은하수처럼 머리 위를 덮고 있던 아카시아꽃 향기는 안개같이 피어오르고 함박눈처럼 꽃잎이 떨어지면서 5월이 가고 사랑도 5월인 양 가버렸지.

그 뒤 바람결에 문득 들려오는 소리 있어 귀 기울이면 첫 사랑 그 아이는 꽃잎처럼 떨어졌다고도 하고 안개처럼 바람 따라 갔다고도 하나 아카시아꽃은 늘 추억처럼 그립고 실연처럼 서럽다.

문득 하얗게 질린 표정이었던 나의 청춘과 앳된 소녀의 살 냄새 나던 시절이 뚝뚝 떨어지는 계절이 그립다.

이제는 잊어도 될 만하건만 꽃향기가 나면 풋풋한 살 냄새 나던 사랑이 떠오른다. 사랑은 아카시아꽃이 필 때 찾아왔다, 아카시아꽃이 질 때 다시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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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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