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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삭발과 반삭발은 분명 다릅니다. 삭발은 통칭해서 머리를 '박박' 미는 것을 일컫지만 반삭발은 머리카락을 '8mm에서 15mm 정도'의 길이로 자르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삭발을 반삭발보다 짧은 길이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라 표현합니다.
제가 바리캉을 이용해 반삭발을 하는 날이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이 그렇듯 제게 삭발은 전형적인 '삭발례(특별한 때 혹은 특별한 목적과 상징적 의미를 담고 머리를 깎는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바리캉을 드는 날은 중요한 시기를 앞두고 결의를 다지고자 할 때입니다.
고교 시절 이후 수십 차례 바리캉을 이용해 이발을 해왔지만 두 번 정도 어머니가 깎아준 것을 제외하고 모두 손수 해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옛말이 다 맞는 것도 아니네요. 사실 스님도 '제 머리' 깎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어머니에게 바리캉을 맡기다
오늘이 그 일 년 중 '의식 아닌 의식'을 위해 반삭발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늘 하던 것처럼 혼자 머리를 깎으려 했지만 도무지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 혼자서는 힘에 부치겠더군요. 그래서 오랜만에 어머니께 바리캉을 들어주십사 부탁했지요. 먼저 웃옷을 벗은 채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어머니께 머리를 맡겼습니다. 긴 머리카락만큼 바리캉은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났을까, 갑자기 어머니가 의아해 하십니다.
"박박 미는 거 맞지? 그냥 밀면 되는 거지?"
"응, 늘 깎는 12mm지."
순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짧지? 분명 늘 그렇듯 12mm 틀을 끼웠는데……."
확인을 하고 또 해도 분명 늘 깎던 대로 '12mm 틀'이 제대로 끼워져 있었습니다. '아, 오랜만이라 짧게만 느껴지는구나' 싶은 마음에 어머니께 계속 이발을 맡겼습니다. 하지만, 거실에서 계신 아버지는 머리가 '하얗게' 드러나는 것 같다며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십니다. 그리고 잠시 후 머리 위를 지나치는 바리캉이 춤을 추듯 전후좌우로 리듬을 타는가 싶더니 갑자기 뒤집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잠깐, 지금 어디로 깎았어?"
어머니가 가리키신 곳은 바리캉의 12mm 틀이 끼워진 곳의 반대 방향. 즉, 앙상한 바리캉의 '이빨'만 있을 뿐 머리카락의 길이를 결정하는 틀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뭐야? 거울! 거울!"
미용실 간다고 잘려진 머리카락이 붙니?
거울로 본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틀이 끼워진 곳으로 잘라 12mm 길이인 머리카락과 틀이 없는 바리캉의 이빨에 쓸려가 길이조차 잴 수 없는 머리카락의 '공존'. 순간 흥분을 감출 수 없었지만, 크게 쉼 호흡을 거듭하고 이 난관을 해결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만, 일단 미용실로 가야겠어!"
"미용실 간다고 없는 머리카락 붙여주나?"
어머니의 '핵심'을 찌르는 지당하신 말에 다시금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찌해야 하나 넋을 잃고 고민한 끝에 내린 '뻔한' 결론. '마저 밀자'. 그렇게 바리캉에서 12mm 틀을 떼고 박박 밀고 말았습니다. '기왕 다지는 결의 제대로 다지자'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더욱이 그나마 '짱구'가 아님을 감사하며 말입니다. "일 주일이면 괜찮아 져"라고 말하며 겸연쩍게 웃으시는 어머니께 농담밖에 할 수가 없더군요.
"솔직히 말해, 월드컵 때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같이 응원하자고 일부러 그런 거지?"
우리 부자는 붕어빵 빛나리
"억지로 빗어 넘긴 머리 '약한 모습'이에요, 감추지 마요 박박 밀어요"- DJ DOC 노래 중
집에 바리캉을 놓게 된 계기 또한 남다릅니다. 정력이 세다는 근거 없는 속설로 자위해야만 하는 '대머리'. 아버지는 가운데 머리가 없는 전형적인 유형의 대머리입니다. 비슷한 헤어 스타일의 인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프랑스 축구 선수 지단이 있겠네요.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그런 대머리를 가리고자 늘 뒤가 막힌 모자를 쓰고다니셨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바리캉을 사서 그나마 옆과 뒤에 조금 남아 있던 머리카락을 밀고 있으신 겁니다. 놀라 이유를 묻는 저에게 아버지는 "모자를 쓰고 있다 벗으면 사람들도 깜짝 놀라고 또 모자를 써봤자 대머리가 아닌 건 아니잖아, 이젠 그냥 박박 밀게"라고 말씀하시고는 깨끗이 '면도'마저 하셨지요.
그날 이후 저에겐 아버지의 헤어 스타일이 가수 구준엽보다 멋있습니다.
약한 모습을 뒤로하고 '당당히' 모자를 벗고다니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나도 대머리가 되면 아버지처럼, '유행가 가사'처럼 해야지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항간에 대머리가 대를 거른다는 말도 있지만 이 역시 제게는 해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이전에 할아버지부터 '쭉' 대머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에 뜻하지 않게 경험한 삭발이 먼 훗날을 위한 예행 연습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더군요.
그래도 무엇보다 가장 큰 위안이 되는 건 이제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머리가 '빛나' 집 안이 아주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미안하고 신기해서 웃으시는 어머니와 '동질감'을 느끼시며 웃으시는 아버지, 게다가 황당함에 거울 앞에 앉아 웃는 저까지 삭발 덕분에 집안에 웃음이 가득하네요.
덧붙이는 글 | 사실 바리캉이란 명칭은, 이발기계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올 때 프랑스의 바리캉 마르라고 하는 회사의 제품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 회사명이 널리 쓰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발기’라는 단어로 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글의 맥락상 바리캉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글은 '미디어다음'에도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