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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까지 스쿨버스 주차장으로 오세요."
오전 7시전에 집을 나서는 딸이 경쾌한 목소리로 제 엄마의 '샤프론' 역할을 확인시켜 준다. 샤프론(chaperon) 제도는 이곳 미국 학교에서 아이들이 참여하는 교외 활동(소풍이나 견학, 자신이 속한 클럽에서의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나서는 학부모를 지칭하는 말이다. 일종의 '학부모 도우미'인 셈.
이날의 일정은 1교시 수업이 끝난 뒤 스탠튼에 있는 블랙프라이어스 극장으로 이동하여 셰익스피어 연극을 감상한 뒤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거라고 한다.
드디어 샤프론 봉사에 나서다
1교시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하나 둘씩 약속 장소인 스쿨버스 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미국의 고등학교는 우리처럼 학생 모두가 같은 교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게 아니고 대학처럼 개인이 선택한 수업을 듣기 때문에 아이들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이번 연극 관람을 주선한 영어 교사인 미스 킴이 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한국말을 못하기 때문에 미스 킴은 인사만 마친 뒤 빠른 영어로 샤프론의 역할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오늘 당신이 챙겨야 할 아이들 명단이에요. 모두 아홉 명인데 다 여학생이에요. 저기 까만 두건을 쓴 애는 쉐이머이고, 흰 티셔츠를 입은 애는 재닛, 그리고…."
스쿨버스쪽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을 가리키며 미스 킴이 설명을 한다. 명단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아이들의 얼굴과 짝짓기를 해보지만 쉽지 않다.
'아이들 이름을 다 기억할 필요는 없지. 얼굴만 익히고 그들이 안전하게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되니까.'
샤프론은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다. 한 명은 나처럼 학부모였고 다른 한 명은 학교에서 일하는 코디네이터였다. 미스 킴은 그들에게도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건네며 설명을 했다.
"오늘 버스를 타고 가는 학생은 37명이에요. 제가 가르치는 3개반 아이들이죠. 지금 바로 스탠튼으로 가서 연극을 볼 거예요. 점심은 오는 길에 각자 싸온 도시락을 차에서 먹을 거예요. 시간이 없어서요."
버스 안은 비트가 강렬한 록음악으로 시끄러웠다. 버스 기사가 흥에 겨워 록음악을 크게 틀어놓았기 때문이다.
손자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운전석 앞에 걸어둔 '정열의 할머니 기사'는 학생들을 향하여 "볼륨이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모두가 'OK'했다. 나는 시끄러워 죽겠던데.
하여간 귀청이 떠나갈 듯한 음악을 들으면서 출발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커플'들을 제외하고는 남녀가 따로 앉아서 간다는 사실이다. 물론 공인된 커플들은 버스 안에서도 진한 애정 행각(?)을 보여 이곳이 미국인 것을 새삼 실감케 했다.
버스가 출발했을 때 맨 앞자리에 앉은 미스 킴과 샤프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생 10명당 1명의 샤프론 필요... 샤프론 없으면 학외활동 어려워"
- 한국에는 이런 샤프론 제도가 없는데 왜 샤프론이 필요한가?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게 될 때는 늘 안전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교사가 모든 학생들을 다 감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샤프론이 필요한 것이다."
- 샤프론은 모두 학부모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지는가?
"그렇다. 하지만 간혹 수업이 없는 선생님이 샤프론으로 따라가기도 한다."
- 미국은 일하는 여성들이 많아 샤프론을 확보하기가 힘들 것 같은데….
"집에 있는 엄마들이 샤프론으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직장에 다니는 엄마들도 하루 휴가를 내고 참여하는 일이 많다. 오늘 샤프론으로 온 에이프릴의 엄마도 실은 중학교 상담 교사다. 샤프론 봉사를 위해 하루 휴가를 내고 온 것이다."
- 학생들이 교외 활동을 할 때는 반드시 샤프론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보통 몇 명의 샤프론이 필요한가?
"학생 열 명당 한 명의 샤프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초등학생의 경우에는 더 많은 샤프론이 필요하다. 고등학생들은 교사의 말을 잘 듣지만 초등학생들은 산만하고 제 멋대로여서 더 많은 샤프론이 필요하다. 물론 샤프론의 역할도 더 힘들다."
- 만약 샤프론이 확보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계획했던 학교 밖 활동을 할 수가 없다. 학교에서 허락이 나질 않는다. 그렇지만 샤프론이 확보되지 않아서 계획했던 활동을 못 하는 경우는 없다."
- 아까 학생들에게 나눠 준 간식(도너츠와 음료수)은 학교에서 제공한 것인가?
"오, 노! 모두 내가 산 것이다(미스 킴은 점심을 안 싸온 학생을 위해서도 베이글과 여러 종류의 도너츠, 쿠키와 음료수도 준비해 왔다)."
- 학교에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다 선생님이 준비하는가?
"나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정말 사랑스럽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 그래서 이런 걸 준비하는 것도 내게는 즐거운 일이다."
우리가 간 블랙프라이어스 극장은 세계 유일의 셰익스피어 원형(原形) 실내 극장을 재현한 극장으로 르네상스의 무대 감동을 다시 느끼게 해 준다는 공연장이다.
이 극장은 연극을 공부하는 학생이나 학자들에게 일 년 내내 연구실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주로 셰익스피어 작품을 공연하는 셰익스피어 전용극장이었다.
이곳은 무대 뒤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이 모두 객석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무대 바로 옆 객석(Lords' Chairs)에서는 배우들의 숨소리와 표정까지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극장이었다.
모든 연령층의 다양한 관객들이 이곳을 찾는다는 블랙프라이어스 극장은 특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교육 목적으로 관람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가 갔던 날도 마침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에서 단체로 관람을 왔다.
이날 우리가 본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희극인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이었다. 영화로도 나왔던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사실은 전날 밤에 인터넷으로 '공부'도 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배우들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만난 어떤 미국인 교수에게 이런 참담한(?) 심정을 얘기했더니 "실은 너 뿐 아니라 우리도 전부 알아듣지는 못한다, 셰익스피어 당시의 고어와 억양을 어떻게 전부 다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말로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샤프론 봉사하기 위해 휴가 낸 학부모들... '감동'의 교육
두 시간 동안의 고단한(?) 연극이 끝난 뒤 아이들은 다시 버스로 돌아왔다. 오후 수업을 하러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각자 싸온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는데 한창 때인지라 다 먹고 난 뒤에도 선생님이 준비해 온 베이글과 간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잠시 뒤, 버스 안을 살펴보니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거나 잠에 곯아떨어진 아이, 친구와 수다를 떠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도 내 옆에 앉은 다른 샤프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셰익스피어와 싸우느라(?) 힘들었던 내 심신을 쉬게 했다.
샤프론으로 봉사하면서 많은 걸 깨닫고 감동받은 하루였다. 학생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선생님(선생님은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일일이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껌을 손바닥에 받아 내기도 했다).
또한 선생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휴대폰과 엠피쓰리 플레이어, 시디플레이어 등을 그대로 차에 두고 내리는 학생들. 샤프론 봉사를 위해 직장에 휴가를 내고 온 학부모들의 모습은 이곳에 와서 새롭게 체험한 미국 교육의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