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동계곡 쪽으로 소백산을 오르면 산을 오르는 길의 절반 이상에서 계곡의 물과 함께 할 수 있다.
계곡의 물은 힘차다. 그리고 날렵하다. 우리는 발 디딜 곳을 찾기도 어려운 바위 사이를, 물은 날렵한 자태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빠른 속도로 아래쪽을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그러나 물은 부드럽기도 하다. 아마 그 부드러움이 없었다면 그 많은 바위 사이를 상처 없이 지나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처음 이 꽃을 보았을 땐 '아니, 아직도 목련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산행길에 마련된 안내판 덕분에 알게 됐다. 이건 목련이 아니라 함박꽃 나무였다. 다른 말로 산목련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이 꽃과 여러 곳에서 마주쳤는데, 자태가 매우 고왔다.
함께 산에 오르는 가족을 만나면 참 특별한 느낌이 든다. 산은 사실 혼자 오르기도 힘든 곳이다. 그런데 아빠는 한 손으로는 등에 업은 딸을 받쳐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들의 갈 길을 끌어준다. 사랑이란 말 이외의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럼 엄마는? 엄마는 평상시의 삶 자체가 그렇다. 그리고 그 엄마가 받쳐주기 때문에 아빠의 사랑이 오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중간쯤을 지나서 소나기를 만났다. 출발할 때는 '쨍'하도록 화창한 날씨였기에 아무 준비도 안 했다. 그래서 꼼짝없이 빗줄기를 모두 뒤집어쓰고 계속 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정상을 600m쯤 남겨두었을 때, 비가 잠시 그쳤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의 윤곽이 뿌옇게 보였다.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에 오르긴 했지만 빗줄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냥 카메라를 품속에 넣은 채 조심조심하면서 비로봉임을 알려주는 표석만 촬영했다.
어찌 보면 이건 내가 산 정상에 올랐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집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정상에 올랐다는 그 사실 하나가 주는 만족감도 말할 수 없이 크다. 그 만족감을 내 기억 속에만 담아두긴 싫었다.
그래서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석 사진을 악착같이 찍었다. 사진을 더 찍기 위해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비에 젖은 온몸에서 느껴지는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결국 곧바로 다시 산 아래로 걸음을 떼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안개는 시야를 열어주지 않는 대신 가까운 풍경을 신비롭게 감싸며 독특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그래서 안개가 감싸면 주목의 분위기도 더욱 신비롭게 변한다.
조금 내려왔을 때 나무들 사이로 다시 '쨍'하고 햇빛이 비쳤다. '히, 약 오르지' 하고 날름 혓바닥을 내미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화내지 않고 그저 '아이고, 귀엽다 귀여워'라고 생각하며 씩 웃어주었다.
빗줄기가 적신 땅을 다시 햇살이 따뜻하게 어루만지면서 길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비온 뒤 산행에서, 그것도 소나기가 지나간 뒤에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내내 비가 내린다면 모를까, 잠시 산을 훑고 지나가는 소나기라면, 이 비는 산행을 더욱 특별하게 해줄 수 있다. 물방울이 맺힌 나뭇잎 풍경은 햇빛이 물방울을 다 거두어간 다음의 모습과 완연히 다르다. 그러니 소나기가 내릴 때 그 비를 쫄딱 맞고 산을 오르내려야 한다고 해도 억울해하지 마시라.
햇빛이 가꾸는 풍경이 있는가 하면, 나름대로 놀라운 예술적 손길을 지닌 소나기가 빚어내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경도 있다. 그 때문에 비가 오면 산은 물이 빚어낸 한 폭의 수채화가 될 수 있다. 서울로 오는 내내 축축한 옷 때문에 불편했지만 소백산의 소나기가 선물한 그 수채화는 그러한 불편을 충분히 보상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