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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중(가명·47세)씨가 드디어 취업이 되었어요.”
“정말이예요. 언제요.”
석중씨의 취업 소식을 전하는 조창규 직업상담원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다양한 표정이 들어 있다.

▲ 면접을 보기 위해 대기중인 구직자들
ⓒ 이명숙

취업이 힘든 취약계층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조창규 선생의 평소 지론은 “취업을 시키려면 일단 살려놓고 봐야지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죽고 난 후 취업시키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살아 있을 때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생활고로 비관 자살을 해버린 후 안타까워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조 선생을 볼때 마다 석중씨 소식이 궁금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그도 그럴 것이 석중씨가 취업을 하면 바로 직업상담 이야기를 쓰겠다고 했기 때문에 갑자기 기운이 난다.

그가 우리 고용안정센터를 처음으로 방문한 날은 지난 3월 8일이었다. 조창규 직업상담원과 장석중씨의 인연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장석중씨는 2년 째 승합차속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서 자는 것, 먹는 것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그런 삶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25살에 결혼을 해서 1남 1녀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그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고향에서 버스기사를 하다 퇴사를 한 후 얼마 되지 않은 농사와 건설일용직을 하면서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삶은 매번 자신을 비껴갔다. 근근이 생활을 하던 그에게 IMF는 치명적이었다.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고 어긋나기만 한 인생. 도대체 삶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다지도 고달픈 것일까?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에 빠졌다. 그는 무작정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산 속에 들어가 마음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는 산속에서 텐트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9년을 살았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속세로 나와 돈을 벌었고 돈이 생기면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 마음공부를 했다. 그렇게 살기를 9년. 먹고 사는 최소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힘들었다.

그가 산 속으로 들어간 것도 산 속에서 나온 이유도 생존이었다. 중고 화물차를 주변의 도움으로 구입해 거의 2년 동안 그 곳에서 밤이슬을 피했다. 승합차로 옮겨서 동업을 하자는 지인의 말을 믿고 옮긴 지 2년. 동업을 하자는 지인은 가 버리고 그만 남았다.

승합차는 화물차보다 편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걱정이 없었다. 월세를 달라는 이도, 전기세, 수도세를 내라는 사람도 없었다. 짐을 넣어 놓을 수도 있었고 잠을 잘 수도 있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아는 절에 가서 얻어다 먹었고, 빨래는 냇가나 계곡에 가서 해결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았다. 그렇게 사는 동안 단 한번도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오직 마음공부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사는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육신이 성한 남자가 하루 세 끼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그를 우습게 봤다. 광주로 나온 지 14일째. 그는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는 사람의 소개로 고용안정센터를 오게 되었다.

승합차에서 기거를 하고 있었던 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숙식을 해결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버스 운전이나 납품배송운전직으로 숙식을 제공해 주는 회사를 원했고 취업이 빨리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현실감각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는 그에게 조 선생은 우선 현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고용여건 등을 이야기 해주었다. 이 지역에서는 숙식을 해결 할 수 있는 업체는 거의 없을 뿐더러 혹시 있다 하더라도 외국인 근로자들이 주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했고, 이력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두 번째 동행면접으로 기숙을 제공하는 회사에 취업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하루만에 자진퇴사를 했다. 화학약품 냄새가 너무 심해 도저히 근무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 선생은 그에게 날마다 숙제를 내주었다. 고용정보망에 들어가 정보 검색하는 방법을 알려준 후 하루에 5군데 정도 업체를 찾아오면 동행면접을 하기로 합의를 했다. 그러는 동안 장석중씨는 취업희망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난 후 석중씨는 희망프로그램을 담당한 진행자에게 “예전처럼 살라고 놔두지 왜 나를 변화시켰어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생존과 직결되었던 장석중씨와 조창규 선생의 취업을 향한 노력은 눈물겨웠다. 취업알선 22번, 동행면접을 6번 했으나 취업은 쉽지 않았다.

석중씨는 취업이 되지 않은 이유를 우락부락한 외모와 나이, 승합차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거주지 불안으로 들었고, 조 선생은 나이와 구직기술 미흡, 거주지 불안, 눈높이 조절 등으로, 구인업체에서는 나이, 거주지 불안정, 조직 적응력이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이유를 들었다.

일단 조 선생과 장석중씨는 거주지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 여기고 한 달에 5~10만원 사이의 월세방을 알아보러 다녔다. 마침 적당한 곳이 나와 그곳으로 5월 16일 이사를 했다. 거주지를 마련한 후 운전직에서 생산관련 단순노무직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 면접 순서를 기다리며
ⓒ 이명숙

5월 18일 상시 구인구직 만남의 날 행사가 고용안정센터에서 있었다. 장석중씨는 그날 면접을 봐서 취업에 성공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고용안정센터를 방문한 날, 취업을 한 것이다.

3월 8일 고용안정센터를 처음 방문해서, 취업에 성공하기까지 2개월 14일 동안 조 선생은 장석중씨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근무시간은 물론 퇴근 후나 공휴일에도 행여나 끼니를 거르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찾아다녔고, 하루 빨리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다각도로 도움을 주었다.

장석중씨가 취업을 한 지 이 주일이 지났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전화를 했더니 컬러링으로 반야심경이 흘러나온다.

“속세를 떠나 살다 다시 돌아왔을 때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기준이었어요. 나는 최소한의 생존인,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을 구하는데, 그러지 않은 삶들도 있더라는 겁니다. 내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어디든지 살 곳이 없어요. 마음을 비우면 그때부터 편해져요. 교대근무를 하는 곳이라 시간이 많아 마음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서 좋아요”라고 하는 그에게 근무 잘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산 속에서 9년, 화물차에서 2년, 승합차에서 2년을 사는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은 상처들을 봉합했을까? 상처 하나 없는 둥글둥글한 공보다 찢어진 상처를 꿰맨 공이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사는 것이란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이라는 그는 고용안정센터 조 선생을 통해 한번 정을 주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인간의 마음을 배웠다고 한다. 취업이든, 사는 것이든, 결국 그 바탕에는 사람의 정이 있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마음공부를 한다는 그와 조창규 직업상담원의 인연이 찔레꽃보다 더 향기로운 날이다.

덧붙이는 글 | 국정브리핑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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