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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아! 저 삼나무처럼 올곧게만 자라다오. 사람의 살결처럼 고운 삼나무 숲.
ⓒ 한석종
어제는 현충일이어서 우리가족은 모처럼 함께 산행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계획을 차질 없이 실천하는 데는 커다란 장애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반항이 하늘을 찌르는 고1의 아들 때문이었다.

"나 안가요! 내가 왜 거길 가야 되는데요?"

녀석의 이 한마디에 일순 집안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모처럼 가족산행으로 마음이 달뜬 중 1인 딸애가 "오빠! 정말 이럴 거야! 내가 오빠 좋아하는 MP3 줄께 같이 가자. 응?" 딸애의 애교 섞인 말투가 애처로웠는지 아들녀석이 외출복 차림 그대로 따라 나섰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휴일이어서 그런지 나들이 차량이 고속도로를 가득 메웠고, 밀려든 차량의 열기로 체감온도는 벌써 30℃를 훌쩍 뛰어 넘은 것 같았다. 백양사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우리는 시원한 그늘과 개울물이 손짓하는 남창계곡으로 향했다. 몇 년 전 이곳에 다녀간 터라 그 울창한 신록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어젯밤 나는 망설임 없이 이곳으로 향하기로 결정했었다.

노령산맥의 줄기에 위치한 입암산은 삼국시대부터 자리 잡은 호남의 3대 산성중의 하나인 입암산성이 있던 곳이다. 녹음이 울창하게 우거져 눈여겨보지 않으면 산성의 흔적을 쉽사리 찾기 힘들다.

▲ 보인다 보여, 입암산 정상. 아빠! 힘내
ⓒ 한석종
▲ 입암산 정상에서 잠시 쉬고 있는 한 가족의 모습이 그지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 한석종
▲ 순간 찔레꽃에 흠뻑 빠져, 한때 가족 잃고 산속을 헤메는 기러기 아빠신세가 되었다.
ⓒ 한석종
중 1인 딸애는 신이 났는지 콧노래를 부르고 엉덩이를 삐죽이며 앞서 나갔다. 그러나 요즈음 잔뜩 멋을 내는 아들은 외출복(하얀 반바지에 노오란 티셔츠) 차림을 하고 잔뜩 인상까지 찌푸려 오가는 산행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입암산 초입에 들어서자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시원한 삼나무 숲이 나타났다. 나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읊조렸다. "아들아! 저 삼나무처럼 올곧게만 자라다오!" 녀석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시원스레 솟아있는 삼나무 숲을 한참 동안이나 올려다보더니 조금 전까지 찌푸렸던 표정을 다소 푸는 듯했다.

산성안에 들어서자 여기저기 찔레꽃이 만발해 있었다. 가끔 띄엄띄엄 군락을 이룬 찔레꽃을 보긴 했지만, 이처럼 흰 소금을 뿌려놓은 것처럼 지천으로 군락을 이룬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흐드러지게 핀 찔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숱한 적에게 이리저리 쫒기며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이곳까지 밀려와 산성안에 갇혀야만 했던 옛 민초들의 삶을 떠올렸다.

찔레꽃은 장미꽃이나 백합처럼 화려하거나 우아하지 않다. 그들은 가시덤불 속이나 개울가 등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잘 자라는 생명력이 강한 꽃이다. 여느 꽃처럼 누구 보란 듯이 피지도 못하고 제 풀에 겨워 스르르 피었다가 지는 모습이 한없이 힘없는 민초들의 삶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감정을 저 아이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녀석들도 제 나름대로의 생각과 살아가야 할 세상이 따로 있겠지! 저들이 말하는 내 고리타분한 생각을 또 다시 주입시켜 이 성벽보다 두꺼운 벽을 만들지 말자.

▲ 제 풀에 겨워 스르르 피었다가 지는 모습이 힘 없는 민초들의 삶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 한석종
▲ 찔레꽃 덤불사이로 정겹게 뚫린 등산로
ⓒ 한석종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찔레꽃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족들은 그곳에 나만 남겨놓고 앞서 가버린 모양이었다. 속력행마로 한참을 따라가 봐도 마지못해 뒤처져 따라가던 아들 녀석의 모습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 내가 꽤나 오랫동안 찔레꽃에 홀렸던 모양이다.

한참을 오른 뒤에야 아들 녀석의 뒷모습이 연초록 나무 잎에 언뜻 걸렸다 사라졌다. 따라잡으려고 한층 속력을 내다가 지쳐서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졸지에 산속에서 쓸쓸한 기러기 아빠가 되어버린 난 앞서간 가족들이 야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어떻게 하면 이 기러기 신세에서 반전을 꽤할까? 아무리 궁리해 봐도 달리 뾰쪽한 수가 없어 풀린 다리에 젖 먹던 힘까지 써가며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아들 녀석이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제 엄마와 딸은 이런 내 모습을 측은한 표정으로 깔깔대며 즐기고 있었다.

가장으로서 체면에 심한 손상은 입었지만 아들녀석이 내민 손 때문에 풀린 다리에 힘이 솟구쳤다. 가족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지치고 힘들 때 아무 조건 없이 손 내미는 관계로구나! 그동안 매번 내 뜻에 항거하며 비토를 놓기 일쑤이던 녀석이 참으로 대견스럽게 느껴지면서 말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녀석의 어깨가 더 없이 넓어보였다.

▲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입암산에 산성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 한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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