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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종호
김근태(사진) 열린우리당 의장이 '올인' 전략을 택했다. 첫째도 서민경제, 둘째도 서민경제, 셋째도 서민경제라고 했다. 국민의 생업을 안정시키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는 뜻의 '제민지산'(制民之産)도 운위했다.

서민들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데에야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궁금한 건 방법이다. 김근태 의장은 '추가성장론'을 폈다.

잠재성장률을 적어도 1%포인트 이상 끌어올리겠다며, 이를 위해 48조~80조원에 이르는 여유자금을 투자부문으로 끌어낼 방안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현대자동차 CEO 출신인 이계안 의원을 비서실장에 임명한 데 이어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 등 실물경제에 밝은 인사들을 중용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먹고 살기 팍팍한 서민들에겐 가뭄에 단비 같은 소리다. 하지만 선뜻 당기지 않는다. 호언장담이 먹혀들 만큼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서민이다.

재벌에게 줄 '당근'

48조~80조원에 달하는 여유자금을 투자부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증시를 활성화하거나 예금금리를 높여야 한다. 하지만 한때 1500선을 돌파했던 주가는 1200대로 떨어져 있다. 한국은행의 콜금리 인상 덕에 연리 5%대의 특판예금에 돈이 몰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돈이 기업 대출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은행의 총여신 가운데 절반 이상이 주택담보대출에 몰려있는 게 현실이다. 또 금리를 추가 인상하면 경기상승 기조가 둔화될 수 있다. 일자리 조금 더 늘리려다가 더 큰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굳이 시중 여유자금을 끌어들일 이유도 없다. 기업 금고에 돈이 수북이 쌓여있다는 보도는 어제오늘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도 기업의 설비투자율은 극히 저조하다. 91~96년에 11.1%에 달하던 기업의 설비투자율이 2001~2005년에 1.1%로 떨어졌다. 10분의 1토막이 났다. 기업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길이 막혀서 투자를 못 한다고 주장한다.

투자를 활성화하려면 기업을 독려해야 하고, 기업을 독려하려면 당근을 줘야 한다. 기업이 손가락 뻗어 까딱거리는 당근은 출자총액제한제와 수도권공장총량제다. 폐지하라고 한다.

출자총액제한제는 큰 이견이 없어 보인다. 정부나 열린우리당 모두 폐지 또는 개선을 언급해왔다. 물길은 잡힌 셈이다. 재벌의 순환출자 폐해는 어떻게 막을 것이냐는 반론이 나올 법 하지만 제쳐두자. 이게 더 궁금하다. 그럼 투자가 활성화될까?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효과는 금방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출자총액제한제 대상이 되는 곳은 재벌이다. 그것도 자산 6조원 이상의 대재벌이다. 이들이 출자총액제한제 폐지에 고무돼 신규투자에 나선다 해도 덩치가 너무 커 보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당장의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다.

수도권공장총량제 폐지는 매혹적이다. 당장의 고용창출을 기대할 수도 있다. 마침 전면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김문수 후보가 경기지사로 당선되기도 했다. 여차하면 경기도의 요구에 부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기조가 흔들린다. 참여정부의 국토균형발전 정책은 전면 수정돼야 하고, 지방의 반발은 극심해진다.

피해가는 방법이 있다. 더 효과적이기도 하다. 서비스와 건설부문을 진작시키는 방법이다. 지방선거 참패 직후 열린우리당 안에서 부동산과 세금정책을 재검토하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함께 묻어나왔던 얘기다. "내수진작책과 기업경기 활성화 대책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쉬워 보이지 않는다. 시장은 따로 가고 있다. 한국은행 집계에 따르면 올 3월말 현재 은행의 음식·숙박업 대출잔액은 14조2492억원으로 2004년 3월말에 비해 1조원 넘게 줄었다. 음식·숙박업 불황에 따라 돈 떼이는 걸 우려해 선제적으로 대출금 회수에 나선 것이다.

정부도 일찌감치 방어선을 쳤다.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며칠 전 정례브리핑을 하면서 참여정부가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쓰지 않은 걸 자랑했다. 부동산 규제정책의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도 여전하다.

어차피 힘이 빠져가는 정부다. 원내 제1당의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다. 여기에 열린우리당의 '전향'을 반기는 한나라당의 협조를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내놔야 한다. 정체성이다. 당 노선의 정체성, 참여정부 정책의 정체성을 담보물로 내놔야 한다. 김근태 의장 개인의 정체성도 물론 저당 잡혀야 한다.

이미 시작된 열린우리당의 전향

김근태 열린우리당 당의장은 11일 비대위 출범 이후 첫 기자간담회를 열고 "서민경제 회생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당의장은 11일 비대위 출범 이후 첫 기자간담회를 열고 "서민경제 회생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 오마이뉴스 김영균
그래서일까? 김근태 의장은 "민주화 세력이라는 것을 더 이상 훈장처럼 달고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지난달 대한상공회의소 초청 특강에서는 자신을 "성장론자·FTA찬성론자"라고 했다. 이날 특강의 제목은 '고도성장과 사회적 대타협이 간절하다'였다.

'사회적 대타협' 얘기를 했으니 하나를 더 얹자. 김근태 의장의 핵심 측근은 "성장을 하려면 기업의 투자확대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그(김근태 의장)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비정규직 관련법이나 노사관계 선진화 로드맵 관련법, 더 나아가 한·미FTA 비준안에 대해 '선협상 후강공' 노선을 견지할 가능성이 크다. 노동자·농민·도시서민과 각을 세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체성 혼란과 지지층 반발을 동시에 야기할지도 모를 길을 김근태 의장은 가려고 한다. 그는 왜 모험을 택하려는 걸까?

김근태 의장은 "이 정도 참패라면 정권을 내놔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렇다. 열린우리당은 지방선거 때마다 강세를 보였던 서울 강북지역에서도 참패를 면치 못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당내 실용파들은 부동산·세금정책 전면 재검토를 꺼내들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 세금마저 올라 강북 서민들의 공분이 극대화 됐다는 분석에 따른 응급책이었다.

김근태 의장도 그리 생각한 것 같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 기조가 유지돼야 한다던 기존 입장마저 한수 물리는 듯한 말도 했다. "기존 정책의 일관성, 타당성은 견지하면서 필요하면 당 정책위에서 일부 문제점을 해결할 것"이라고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면 일단 끄고 봐야 하는 건 필수다. 하지만 어떻게 끌 것인지는 선택이다. 급하다고 물을 양동이째 퍼부으면 바지까지 젖어버린다.

시간의 부담을 떨쳐라

김근태 의장은 그랬다.

"지지부진한 개혁을 질책하는 목소리와 개혁피로증을 말하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어느 것이 주요한지 부차적 요인인지 당원들의 말도 듣고 큰 그릇은 비대위원들과 함께 만들어 보고하겠다."

지방선거 참패의 원인이 개혁실종에 있는지 민생파탄에 있는지 좀 더 고민해보겠다는 취지의 말이다.

이게 문제다. 당원들의 말을 듣기도 전에, 비대위원들과 논의하기도 전에 대강을 잡아버렸다. 문제를 풀기도 전에 정답을 꺼내든 것이다. 이건 '풀기'가 아니라 '찍기'다. 그래서 '낙제' 위험성도 크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서, 비대위 체제가 한시적이라고 해서, 당내 우파의 '좌편향 공격'으로 전열이 흐트러질지 모른다고 해서 '속성반'에 가입할 필요는 없다. 몇 날 며칠을 굶어 위가 쪼그라들었을수록 밥보다 미음을 먼저 먹는 법이다.

김근태 의장이 먼저 떨쳐야 하는 건 민심의 부담이 아니다. 시간의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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