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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켓이 325달러, 바지가 125달러래."
"뭐라고, 그러면 450달러? 45만원이면 신랑 신부 예복값에 버금가는 돈인데 고등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렇게 비싼 유니폼을 입는대?"
"이번에 우리가 입게 된 유니폼은 완전히 브랜드뉴(brand new) 유니폼이라잖아. 그래서 새로 맞춰야 한대. 그리고 밴드 활동에 필요한 활동비는 125달러인데 밴드 티셔츠와 폴로셔츠, 구두와 캠프비 등이 포함된 거래."
"에엥, 뭐야. 모두 얼마라고? 그럼 575달러? 으악."
중학교를 마치고 올 가을에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작은딸이 '마칭밴드(marching band)'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밴드팀은 밴드 경연대회에 나가기도 하고, 학교의 주요 행사, 이를 테면 미식축구 등의 스포츠 경기가 있을 때 경기 전이나 하프타임 때 연주를 하는 일종의 밴드 응원팀이다.
중학교에서도 이미 퍼커션 연주로 밴드 활동을 했던 딸은 고등학교에 가서도 밴드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오리엔테이션에 갔다 오더니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밴드를 안 하면 좋겠어?"
"… 아니."
딸아이는 중학교 밴드팀에서 드럼과 마림바 등의 타악기와 키보드를 연주했다. 그리고 밴드팀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잘한다는 칭찬도 곧잘 듣곤 했다. 하긴 집에서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하는데…. 그런 딸의 열정을 아는지라 나는 딸의 밴드활동을 반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니폼 값이 45만원이라고? 몇 번 입지도 않을 옷인데 그렇게 큰 돈을 써야 한다고? 언뜻 생각하기에도 부담이 되는 돈이었다. 하지만 딸이 워낙 좋아하니까 다른 데서 아끼더라도 밴드활동만은 허락해 줘야겠다고 내심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고민이 된 작은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 언니에게 진지하게 해법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내가 하고 싶으니 엄마는 돈을 대 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돈을 어떻게 마련하지?
미국에 와서 아이들에게 생긴 변화 가운데 하나는 용돈을 달라고 무조건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적은 돈이긴 하지만 두 아이 모두 얼마씩이라도 돈을 벌고 있어서겠지만…. (큰 딸은 교회에서 피아노반주를 하면서, 작은딸은 파워포인트 문서작업과 영상 작업을 하면서 매달 80달러와 20달러를 장학금으로 받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서 보는 미국 아이들의 독립적인 태도를 보면서 우리 아이들도 그냥 돈을 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지라 작은딸 역시 밴드팀 활동에 드는 비용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제 언니에게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큰딸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너 그럼 '펀드 레이징(fund raising)' 해. 그러면 되잖아."
이곳에서는 돈이 필요하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기금을 모으는 펀드 레이징을 많이 한다. 펀드 레이징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주로 물건이나 먹을 것을 팔기도 하고 세차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책이나 잡지 따위를 팔아 필요한 돈을 마련한다.
우리가 잘 아는 어떤 한인 여학생도 캠프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펀드 레이징을 했다. 그녀는 집집마다 다니며 펀드 레이징을 왜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다음 이웃 주민들로부터 주문을 받았다.
무슨 주문을 받았느냐고? 바로 싱싱한 캘리포니아산 오렌지 주문을 받은 것이었다. 오렌지를 사겠다는 이웃 주민의 이름과 주소를 확보한 뒤 캘리포니아에 있는 오렌지 농장과 직접 접촉을 해서 주민들에게 오렌지를 보내줬다고 한다. 물론 캠프 비용을 충분히 댈 만큼의 돈을 벌었고.
이와 같이 미국 학생들은 필요한 기금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펀드 레이징에 나선다고 한다.
밴드 활동을 위한 펀드 레이징 프로젝트
작은딸은 제 언니와 머리를 맞대고 펀드 레이징을 위한 '프로젝트'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방바닥에 벌렁 엎드린 채 펀드 레이징을 숙의하는 두 딸의 모습이 자못 진지했다.
한참을 논의하며 진지하게 종이 위에 뭔가를 적고 계산기를 두들기던 소녀들, 마침내 프로젝트 시안을 발표했다.
첫째, 쿠키를 직접 만들어서 판다.
쿠키 재료는 간단하게 '쿠키믹스'를 이용한다. (쿠키믹스란 쿠키를 굽기 위한 모든 재료가 다 들어 있는 것으로 반죽만 해서 구우면 되는 간편 재료다.) 다 구워진 쿠키는 예쁜 포장지를 사서 포장한 뒤 학교에 가져간다. 친구와 선생님들에게 펀드 레이징의 취지를 설명하고 쿠키를 판다. 그 다음에는 동네를 다니며 각 가정을 방문하여 쿠키를 판다. 쿠키는 세 개 한 묶음에 1달러를 받는다.
둘째, 쿠키 판매만으로는 밴드비용을 다 감당할 수 없으므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월마트나 JMU(제임스메디슨 대학교) 캠퍼스에 가서 펀드 레이징의 취지를 설명하는 문구를 적어두고 연주를 한다. 연주곡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곡, 예를 들면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나 가벼운 클래식을 연주한다.
작은딸이 발표한 프로젝트 시안은 너무나 놀라웠다. 아니,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왜냐고?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딸이 남 앞에 나서서 그런 일을 한다고?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작은딸은 큰딸과는 달리 남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까지 반장, 부반장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아이다.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아무리 추천을 해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아이가 남들 앞에서, 더구나 외국인 앞에서 쿠키를 팔고 바이올린을 연주한다고?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펀드 레이징'이 단순한 구걸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남 앞에 손을 내밀고 얼굴을 팔아야(?) 하는, 낯이 두꺼워야 하는 일인데…. 과연 딸아이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