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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까투리 여사'와 너무나 황망스럽게 만나게 된 것은 그제(6월 13일) 오전 9시 무렵이다.
나는 곡성 섬진강가 산 속에 있는 '산절로야생다원' 차밭에서 장마를 앞두고 무성한 잡초를 뽑고 있었다. 산허리에는 섬진강 물줄기가 올려보낸 강 안개가 자욱했다.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산에 오른 상쾌한 기분으로 야생 차나무가 쑥쑥 커가는 모습에 취해 잡초(큰 까치수영·고사리·산딸기나무·땅싸리 등)를 뽑았다.
그 때,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파다다닥! 까투리 한 마리가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와 날개를 반쯤 벌리고 다친 시늉을 하며 내 주위에 지름 10m 가량의 원을 그리면서 시선을 유도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 끌려 얼떨결에 온 신경을 빼앗기고 말았는데, 까투리 여사는 2~3분 뒤 파르르 찻길을 가로질러 앞산으로 날아가 버렸다.
한알 두알, 두근두근... 알을 품고 있던 까투리 여사
아차! 생각을 가다듬고 보니 바로 턱 밑에 몽실몽실한 알 10개가 빼곡히 누워있는 '꿩 둥지'가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까투리 여사는 풀을 뽑는 내가 자기 코 앞까지 와서 휘젓고 다녀도 꼼짝 않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 위급을 느껴 둥지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놀라고 흥분한 가운데 알의 수만 세어보고 얼른 그 자리를 떠나 차가 있는 길가로 내려왔다. 알을 세는 순간에도 가슴이 방망이질을 해댔다.
시골에서 자랐기에 어릴 적 어른들이 잡아온 꿩새끼(꺼병이)들을 본 적은 있지만, 알을 품고 있는 꿩을 직접 맞닥뜨린 것은 처음이다. 생명력 발랄한 6월의 녹음 속에서 팔팔한 한 생명체가 10개의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있는 현장. 이, 얼마나 가슴이 울렁거릴 수밖에 없는 성스러운 장면인가 말이다.
나는 찻길로 내려오자마자 황급히 함께 일하고 있는 곡성 아줌마들 쪽으로 가서 꿩알 만난 이야기를 했다.
지난 가을에도 아주머니들과 잡초를 뽑아주다가 풀 속에서 원앙이 둥지를 만났는데 그 때 나간 원앙이는 그 뒤 돌아오지 않은 일이 있어서 이번에 놀라서 집나간 까투리 여사의 거취가 걱정되었다.
아주머니들의 답은 명료했다. 틀림없이 곧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아주 가까이 올 때까지 날아가지 않은 것은 알이 깰 시간이 임박했다는 것이고, 곧 나올 새끼들을 둔 꿩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임산부 꿩을 위한 아주머니들의 배려
아니나 다를까, 한 20분쯤 뒤 숲 속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더니 꿩이 날아간 방향의 반대쪽에서 낙엽 깔린 땅을 걸어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꿩이 보금자리를 튼 곳은 참나무 두 그루가 서로 몸을 꼬고 자란 밑둥 바로 앞이다. 주변엔 차나무와 잡초들이 앞을 살짝 가려주고 둥지 앞 3m엔 산절로야생차밭에 오르내리도록 새로 낸 찻길이 있다. 게다가 둥지 주변 바닥엔 지난해 떨어져 쌓인 낙엽이 소복히 쌓여있다.
이 낙엽과 참나무 등걸은 까투리과 색깔이 전혀 구별되질 않는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꿩이 놀라서 달아나지만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일이다.
둥지 안은 땅을 한 10㎝ 정도 파내 낙엽 몇 개 겨우 깔아놓은 것이다. 바닥에 흙이 드러나 있으면 땅에서 습기가 올라와 어미가 잠깐만 자리를 비우고 알이 식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곡성 아주머니들이 굶고있을 꿩을 생각해 콩을 한 줌씩 가져왔다. 장끼가 가끔 먹이를 날라다 주는지는 모르지만 거의 한 달 동안 탱탱 굶다시피 할 꿩을 생각한 출산 경험이 많은 아주머니들의 배려였다.
나는 꿩 가까이에 콩을 뿌려준 뒤 400mm 망원렌즈로 사진을 찍었다. 꿩은 한쪽으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꿈쩍 않고 앉아있다.
쏟아지는 비, 엄마꿩은 둥지를 지켰다
사실 지금 꿩이 알을 품은 것은 때가 좀 늦은 일이다. 섬진강변 길가엔 대여섯 마리씩의 새끼들이 딸린 꿩 가족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그 새끼들이 기는 단계를 지나 이미 5~6m씩 날면서 훌쩍 뛰어다닌다. 산절로야생다원의 이 꿩은 아마 첫 배를 실패하고 두 번째로 알을 품었거나 제때 짝을 못 만났다가 만산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어제(6월 14일)는 많은 비가 내렸다. 나는 꿩이 걱정돼 아침 일찍 산에 올랐다. 꿩은 3m 앞까지 다가가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망원렌즈로 사진을 찍어보니 머리와 등에 비를 철철 맞고 앉아있었다. 부리 바로 앞으로는 두 가닥의 참나무 등걸에서 작은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빗물 줄기가 지나가고 있다.
낳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어미 품을 떠나 평생 돌아오지 않을 새끼들을 위한 '위대한 산고'.
이 일을 두고 일하는 한 아주머니가 한탄스런 한 마디를 던졌다. "저런 것들도 저러거늘, 산짐승보다도 못한 인간들…." 이 아주머니는 두 아들이 사업에 실패해 며느리들이 집을 나간 뒤에 날품팔이일을 하며 손자 네 명을 건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