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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책이야, 형(혹은 오빠)은 매번 책만 줘요?"

학창 시절 2∼3일에 한 번씩 '지겹게' 돌아오는 누군가의 생일 날. 초대는 고맙지만 빈손으로 자리에 앉기는 무엇하고, 무얼 선물해야 할까… 고민을 거듭하지만 결국 손길은 단골 책방의 서가를 천천히 짚어 나가게 된다.

나름대로 그 사람과 맞는다고 생각한 혹은 그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책을 골라냈을 때 입가에 그려지던 소박한 미소. 이어 표지 뒷면을 열고 성의껏 적어 내려가던 축하와 기원의 이야기. 그런데 막상 "또 책이냐" 하는 반응이 돌아올 때는 한편 섭섭한 감정이 스치기도 한다.

다음엔 다른 선물을 건네리라 마음먹지만 그것도 잠시, 매번 비슷한 지적을 당하면서도 다시 또 누군가의 생일이 돌아올 때나 축하할 일이 생겼을 때,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 무언가를 챙겨주고 싶은 이가 생길 때면 발걸음은 여지없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새 10여 년 이쪽저쪽의 사연이 된 듯하다. 책 한 권으로 전하는 마음의 울림을 잊어가며 주는 것도 동시에 받는 것도 잊게 되는 일상이다. 책이란 사람에게 무엇일까. 그저 세월의 흐름 속에 적당히 빛 바래고 먼지가 내려앉은 장식품의 하나는 아닐까. 때로 내면을 향해 주책없는 타박을 내뱉게 된다.

아주 오랜만에 전해져 온 책 한 권

▲ '트렌드' 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선택 하겠다는 안성호 씨.
ⓒ 나영준
"책 한 권, 보시겠어요?"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의 손을 거쳐 한 권의 책이 다가왔다. <때론 아내의 방에 나와 닮은 도둑이 든다>, 작년 9월에 나온 소설집이었다. 책장을 열고 천천히 그러나 쉼 없이 읽어 내려갔다.

나비를 먹는 여자의 환각을 느끼는 초병의 모습을 그려 낸 '나비', 아내와 불륜을 벌인 남자 둘 모두를 살해해 프라이드 자동차 밑에 매장하는 '때론 아내의 방에 나와 닮은 도둑이 든다', 하늘에 떠 있는 사내를 본 여러 사람들의 상상을 그려낸 '하늘에 떠 있는 저 사내를 보라' 등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책에는 낯선 비유와 상징이 가득하지만 제목만큼 독특한 작가의 상상력이 군데군데 빛나고 있다. 또 소설은 꿈과 환상을 넘나들지만 '깨어보니 꿈이더라' 식의 예고된 친절을 베풀진 않는다. 물론 행간에 펼쳐진 환상은 현실의 참을 수 없는 저열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뒤틀린 일상을 돌아다보게 만든다. 아무튼 힘이 있다. 독특하다. 그리고 기발함이 뚝뚝 떨어진다.

즐겁게 읽었으니 당연히 글쓴이가 궁금할 차례다. 안성호(39), 2002년 <실천문학>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고, 2004년에는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게다가 같은 해 <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까지 지급 받은 인정된 젊은 작가다. 다음 할 일은? 당연히 연락하고 만나봐야지. 이런 능력 있는 작가를 인터뷰 안 한다는 것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업무태만'이다.

서울 마포의 작업실, 표지에 실려 있는 사진보다 다소 몸매가 좋아진(?) 안성호씨가 넉넉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거침없는 상상력을 쏟아내던 소설의 이미지, 다소 피곤한 표정을 염려했지만 활짝 열린 얼굴에 그늘은 없었다. 이어 소설 이야기와 작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트렌드'에 연연하지 않고 써 내려간 상상의 산물

- 작년 9월에 출판된 것으로 알고 있다. 책은 많이 팔렸는가.(웃음)
"물론 많이 안 팔렸다. 요즘 책들이 다 그렇다. 솔직히 10만 부, 100만 부 팔릴 책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국가에서 지원금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는 이 중의 하나다.(웃음) 소재를 선택하거나 실제 글을 쓸 때 대중의 유행을 쫓으려 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것을 따라가면 책 판매 부수를 늘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지키려 한다."

-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첫 소설집으로 안다. 작품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은?
"소설은 효창공원 옆 청파동에 살 때 쓴 것이다. 가난할 때, 문학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매달린 작품들이다. 말하기 좀 무엇하지만 서울역에서 꽁초를 주워 피우며 쓰기도 했다. 실험적이지만 2년여에 거쳐 많은 공이 들어갔다. 8편의 작품 모두 애정이 있지만 그 중 몇 개가 더 애착이 가기는 한다."

- 소설 저변에 강한 상징이 흐른다는 느낌이 든다. 주위의 반응은.
"그렇다. '하늘에 떠 있는 저 사내를 보라'의 경우 강한 상징이지만 그런 것도 문학으로 써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로테스크하고 색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식으로 써 온 이가 없기에 한 사람 정도는 무방하지 않을까…. 많은 출판사나 계간지 쪽에서는 현대의 문학 흐름과는 별개지만 '독특하다'라는 반응이다. 출판 후 다행히 평론가들에겐 호응을 받았다."

- 소설과 시로 모두 등단했다. 차이점이 있을까.
"소설의 문장을 보면 '이 친구가 시를 쓰는구나' 하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상징과 은유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장점도 단점도 될 수 있다. 때로 지루할 수도 너무 비약이 심할 수도 있다. 잘 알고 있지만 스타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

- 소설 등단 후 시로 다시 등단을 한 이유가 있을까.
"사실 소설로 등단하고 나서 1년에 소설 청탁이 딱 한 번 왔다. 그런데 그게 많이 온 것이라고 하더라. 서글펐다. 원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를 못하는 이의 억눌린 욕망이란… 답답하더라. 흔한 이야기로 '나와 독자가 그렇게 소통이 안 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웃음) 이후 시로 다시 등단했다."

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문학계의 엄숙주의

▲ 인고의 산물, 그의 첫 소설집이다.
ⓒ 나영준
- 장르를 넘나든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우리나라 작가의 딜레마다. 실제 프랑스나 서구유럽의 작가들은 시인들이 소설은 물론 방송대본, 희곡까지 쓴다. 아무런 흠이 아니다. 유독 우리나라만 그런 쪽에 인색하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간혹 산문집을 제외하면 오직 한 분야만 파야 하는 것으로 안다. 성석제씨 등 몇 명이 분야를 넘나들긴 하지만 그것을 좋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 그것이 문학계 내부의 '엄숙주의'와 관련이 있을까.
"그렇다. 오로지 하나만 잘 해라 하는 식이다. 그런 활동에 대해 '촐싹거린다'는 반응들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기존 문학 틀에서 벗어나 밖에 있는 것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내 글이 그런 틀을 깨는 데 일조했으면 한다."

- 문화예술인들의 경우 그 길로 들어서게 되는 성장기의 계기가 있다. 남들 눈에 안 보이는 UFO를 봤다든지 하는….(웃음)
"어릴 때 집이 마산에서 오리알 장사를 했다. 때로 태풍이 몰아치면 함석지붕이 뜯겨 나가고 오리들이 바람에 함께 날아간다. 또 둑이 많았다. 저녁이 되면 염소 수백 마리를 몰고 가는 이의 모습이 현자가 지팡이를 짚은 형상이었다. 그런 감수성이 더해지지 않았을까."

- 많은 문학청년의 꿈인 '신춘문예' 출신이다. 당시 기분과 현재 달라진 것이 있을까.
"연락을 받았을 때도 그렇고… 우선 허탈했다. 빨리 등단하는 게 중요하기는 했지만 한편 혼란스러웠다. 사실 본심에는 한 해 서너 번씩 올랐다. 왜 등단이 안 되냐며 인터뷰를 하자는 기자도 있었다.(웃음) 물론 그 이유를 스스로 잘 알기에 힘들진 않았다. 필요했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들이) 오래 가고 잊히지 않을 것이다."

- 앞으로 스타일의 변화가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준비중인가.
"대중과 가까이 하고 다가서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인물이나 시·공간의 배치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 조금의 변화는 있을 뿐, 뼈대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밀고 나갈 것이다. 좋은 글로 찾아 뵙겠다."

그는 이어 "신부로 상징되는 이 사회의 종교적 권력과 교수로 대표되는 고착된 교권의 이야기를 준비 중"이라며 유쾌하고 여운을 남긴 이야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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