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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 잡는 여자>.
<뱀 잡는 여자>. ⓒ 서정시학
무장해제하고 축 늘어져 있는
녀석을 보고서야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도대체
여자 나이 몇 살이면 뱀을
때려잡을 수가 있단 말인가?

뱀 한 마리
잡는 사이에 나는 부쩍 늙어버린 여자였다.


위 시는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여성작가 한혜영씨의 근작시 '뱀 잡는 여자'의 뒷부분이다. 한씨가 이 시를 쓰게 된 것은 집안 뒤뜰에서 배를 깔고 스르륵 기어가는 뱀을 때려잡은 '충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정신없이 삽날로 후려치고 난 후에야 뱀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서야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무서웠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무서웠다'고 고백한 것은 방금 혀를 날름거리던 뱀이나 죽어서 축 늘어진 뱀 때문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자신의 돌발행위 때문이다. 도대체 여자 나이 몇 살이면 뱀을 때려잡을 수 있단 말인가?

아메리카에서 띄우는 '서산 갯마을 가시내'의 노래

그녀는 얼마 전 오십을 넘겼다. 그리고 뱀을 잡은 '충격' 때문에 "부쩍 늙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그녀가 정작 무서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녀는 정말 부쩍 늙어버린 것일까.

비교적 늦은 나이에 동시조로 문단에 발을 디딘 한씨는 내면에 담긴 모든 삶의 역정들을 지난 10여 년 동안 동화, 소설, 시 등의 형태로 마음껏 쏟아놓았다. 일부 비평가들은 한씨의 '전공'이 무엇인지에 질문하고 있지만, 그녀는 그따위 '구분'에 따라 구분되기를 거부해 왔다. 일찍이 물 건너 미국에 온 그녀에겐 응어리가 많다. 그 응어리를 풀어내려면 시로도 부족하고, 소설만으로도 안 된다.

뻥 한방이면 갑절로 불어나는 보리쌀을
우리 엄마는 어째서 한 됫박도 못 내놓는 것인지
울 아버지도 뻥 아저씨 같은 전사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뻥이야!' 중)

'보리쌀 한 됫박'의 쓰라림을 품고 검정 고무신으로 '서산 갯마을'을 누비던 '가시내', 고단한 삶에 쫓겨 서울로 내달렸던 '가시내', 새 삶을 개척해 보겠다고 선뜻 태평양을 건너 산전수전을 겪어온 그 '가시내'에게 '동화면 동화, 소설이면 소설, 시면 시를 쓰라'고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

그녀는 동화집 <팽이꽃>(1998), <뉴욕으로 가는 기차>(2001), <비밀의 계단>(2002), <붉은 하늘>(2003), <날마다 택시 타는 아이>(2005) 등을 통해 어린 시절의 쓰라림을 달랬고, 장편소설 <된장 끓이는 여자>를 통해 이민자들이 안고 있는 정체성의 혼돈을 토로했다. 가 사이사이에 낸 시조집 <숲이 되고 강이 되어>(1990)와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2002), 이번에 낸 <뱀 잡는 여자>는 동화와 소설만으로는 어떤 한계를 느낀 작가가 이들을 응축시켜 토해낸 실존적 '외마디'라고 할 수 있다.

갱년기 여성의 이중심리

'서정시학' 출판사가 다섯 번째로 엮은 시집인 <뱀 잡는 여자>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갱년기 여성이 겪는 당황스러움과 혼란을 주로 담고 있다.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 '젊었다고 말하기엔 신체적 변화가 심상치 않게 나타나고, 늙었다고 인정해버리기엔 억울한' 이중 심리가 담겨 있다. 주로 어린이가 주인공인 여러 편의 동화를 써 왔던 작가가 자신의 복잡한 심사를 엮어내며 겪었을 감정의 소용돌이를 생각하면 '독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휘청 휘청 돌아가는 연못
낡은 턴테이블 앞에 쭈그리고 앉습니다
예스터데이~ 흐느끼는 물풀 위로
한 떼의 시간이 꼬리를 끌며 지나갑니다
촌스런 전나무도 이런 팝송 하나쯤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오렌지는 아까보다 조금 더 붉어지는데
난데없이 튀어 오르는 판! 금이 간
청춘 위에서 깨어진 노래 알갱이들이
딸꾹 딸꾹 뛰다가 구르고 있습니다
(중략)
커피를 폭폭 끓여대며 짝사랑했던 더벅머리
그 날의 디제이는 긴 긴 외출 중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예스터데이' 중)

이밖에도 작가의 '당황스러움'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들로는 '뱀 잡는 여자'를 비롯해 '어떤 첼리스트의 노동', '도강을 거부하는 밤', '아름다운 음모', '옛집에 갔네', '늙은 여왕', '입동' 등이 있다.

2부에서는 사물에 대한 작가 개인의 인식이나 사회현상을 다룬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시선은 대체로 어두운 쪽으로 향해 있다. '나쁜 소식', '조개에게 듣다' 등은 빈곤 때문에 발생하는 자살 문제를, '고장난 가족'과 '공존' 등에서는 메마르고 혼탁한 시대의 문제점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민자의 눈으로 바라본 '아득한 횃대'는 불법 체류자의 고단한 삶을, '그린이라는 흑인 노파'에서는 잔인한 전쟁의 상흔을 아프게 그려낸다.

손 댈 수 없을 만큼
깡마른 갈잎 한 장을 만났다고 생각했어
손가락만 대도 바스락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노파 이름이 그린이라 했지
물기라곤 한 방울도 남아 있을 듯싶지 않은
수맥 오래전에 닫아건 듯이 보이는
노파가 그린이라니, 이상했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었어 누구라도 대대손손
이파리를 낳는 나무, 지느러미 퍼들퍼들
살아 움직이는 초록 한때를 지나왔을 거라고
유쾌하게 해석하고 그린 그린 불러줬지
월남전서 아들을 잃었다는 그 노파를

오늘도 노파의 흔들의자는 끄덕끄덕 떠나가네
('그린이라는 흑인 노파' 중)

3부에는 가난했던 시절과 늘 연민했던 가족들에 대한 아픔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 '옛 시간의 모음집'이 "아물지 않는 상처이면서 동시에 지칠 줄 모르는 생을 자극하기도 했다"고 작품 후기에서 적고 있다. 시를 쓰는 작업이야말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작품으로는 '뻥이야!', '다시 보는 화면', '수학여행', '쥐똥열매 한때' 등이 있다.

작가의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들은 아픔을 넘어 감동적이다. '똥끝'과 '어머니와 장롱', '줄에 앉은 새', '두런대며 여름은 지나가고' 등은 똥끝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사는 일이 줄에 앉은 새와 같았던 그 어머니와 일찍 헤어져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과 죄스러움, 그리움이 절절이 드러난 작품이다.

임종이 가까워지면 제일 먼저 활짝 열리는 것이
항문이라 하네 열고 채우기를 반복했던
둥근 괄약근의 열쇠를 찾을 수 없는
세상 바깥으로, 아주 던져버리는 일이라 하네
어머니의 똥끝은 왜 그리 자주 탔는지
(중략)
'당신의 항문을 폐쇄합니다'
의사는 매정하게도 각께를 땅땅! 쳐 버렸다네
캄캄한 절망 곳곳을 다 뒤져가며 암(癌), 암, 암
전부 캐내고 말 거라고, 날카로운 불면 끝으로
(중략)
누구나 산다는 것은 똥끝을 태우는 일의 연속이겠지만
어쩌다 똥끝을 다 태워먹고 자신의 몸속에 갇혀
전전긍긍하며 절규했던, 아아 내 어머니!
똥끝이 땅끝과 같은 말임을 그때 나는 깨달았네
('똥끝' 중)

시인이 정말 두려워한 것은 무엇일까

시집 <뱀 잡는 여자>에서 드러난 한혜영 작가의 사물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시어(詩語)들은 뱀을 잡는 것만큼이나 부쩍 대담해지고 원숙해진 것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온다. 다만 1부에서는 처절하게 드러난 자아에 대한 통찰이 돋보인 데 비해, 2부와 3부에서는 주제가 타자로 옮겨지면서 피상적 현상 묘사에 그치고 있어 아쉽다. '개인에 대해 치열한 만큼 왜 타자에 대해서는 치열하지 못할까'라는 질문을 '서정시학 시인선'에 던진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까?

이제 한혜영 작가는 다른 시도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새 잔치를 시작하기에 앞서 '마흔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한 어느 작가처럼, 시집을 다 읽은 후 "무서웠다"거나 "부쩍 늙어버렸다"고 한 그녀의 고백 역시 '선언'으로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가 정작 무서워한 것은 뱀도 아니고 갱년기 자체도 아니었다. '도전'에 대한 '응전'의 방식이 예전과 달라졌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상서롭지 않은 예측 때문에 두려웠던 게 아니었을까. 인간은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앞서 항시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다.

부쩍 늙어 버린 것은 그녀가 아니라 크로노스(편집자 주 :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버지,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에 따른 순차적인 역사 즉 연대기 의미)의 나이였을 뿐이다. '도전'에 대한 '응전'을 그토록 야무지게 해 온 그녀의 카이로스(편집자 주 : 구체적인 감정과 존재 의미를 느끼는 시간, 신과의 관계성 및 삶의 연대성 안에 있는 시간 의미)의 나이는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충분히 젊다.

플로리다 해변가에서 심부에 담긴 응어리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풀어왔던 그녀가 다음번에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자못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플로리다 코리아위클리(koreaweeklyfl.com)에도 실렸습니다.


뱀 잡는 여자

한혜영 지음, 서정시학(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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