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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우사
1961년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번 지역의 한 건물에서 4달러짜리 아르바이트가 한창이다. 학습에 대한 실험에 자원한 두 사람은 제비뽑기를 통해 각각 학생과 교사 역할을 맡는다. 연구자는 학생이 단어를 틀릴 때마다 교사가 학생에게 아주 약한 전류를 흐르게 하는 간단한 실험이라고 소개한다.

첫 단어를 틀리고 가벼운 전류를 흘려보낼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긴장한 학생은 거푸 단어를 틀리고 실험을 주도하는 연구자는 교사에게 더 강한 전류를 요구한다. 학생은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지만 연구자는 심드렁하게 "별 일 없을 것"이라거나, 단호하게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면서 교사를 독려한다. 교사는 눈을 질끈 감고 제일 높은 단계가 될 때까지 전류 버튼을 누른다.

4달러에 인간 극한을 시험당한 사내가 교사 역할을 맡은 것은 사실 우연이 아니다. 학생 역할을 맡은 사람은 연구자가 고용한 사람이다. 이 실험은 학습 효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권위에 복종하는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무리 불합리한 명령이라도 납득할만한 조건이 갖춰지면 정상적인 인간이라도 도덕적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가혹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가설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직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 헤스의 좌우명인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라는 문구가 붙어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정문.
ⓒ 범우사
나는 스탠리 밀그램의 이 실험을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라는 책에서 알게 됐다. 한때 베스트셀러에도 올랐던 이 책은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 실험 10장면'이라는 부제처럼 중요한 심리 실험들을 쫓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심리 실험들이 이뤄진 동기는 제각각이었지만 뜻밖의 계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포스트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즉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행한 유대인 대학살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 역시 귀족 가문 출신이거나 사회의 엘리트이며 군인으로서 명예를 중요시한 독일 장교들이 어떻게 민간인이나 포로를 학살하라는 명령에 순순히 따랐는가,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 독창적인 학살 방법까지 고안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서양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학살을 자행한 전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학살은 나치의 등장 이전엔 '문명과 야만'이라는 편리한 틀로 합리화됐다. 그러나 나치의 대량 학살은 같은 문명인이라 여겼던 독일인들에 의해 자행됐다는 점에서 서양인들에게 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소독을 한다는 구실로 유태인들을 몰아넣은 뒤 치클론B 독가스로 학살했다.
ⓒ 범우사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헤스의 고백록>(이하 '고백록')은 스탠리 밀그램이 궁금해 했던 바로 그 독일인이 죽음을 앞두고 직접 써내려간 회고록이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헤스는 패전 직후 도피하다가 1946년 영국군에 체포되어 1947년 바로 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됐다. 교수형을 앞둔 헤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고백록>에서 헤스 자신도 "대중은 아우슈비츠 소장에게서 피에 굶주린 짐승, 잔학한 사디스트, 그리고 대량학살자를 보려고 할 것"이라면서도 "그 사나이 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고 그 또한 악인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렸을 때 신부를 꿈꿨던 이 사내는 어찌하여 대량학살의 집행자가 되었을까? 술과 담배도 거의 즐기지 않고 직무에만 충실했던 이 사내는 어떻게 낮에는 학살을 감독하고 밤에는 가족들과 오붓한 식사를 즐길 수 있었을까?

'명령이었고 직무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독일과 일본을 대상으로 열렸던 전범 재판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변명이었고, 이후 여러 전쟁에서 되풀이된 학살과 잔학행위에서도 되풀이된 주장이었다.

이러한 변명을 들을 때마다, 평범한 인간을 학살자로 만들어 버리는 '명령을 수행하는 정당한 직무'라는 편리한 핑계에서 왜곡된 체제의 무서움이 느껴진다. 헤스가 고백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으로써 교훈을 남기고 어둠이 끝난 것이 아니라, 그가 사라진 뒤에도 수많은 '정당한 명령과 직무' 수행이 되풀이되었다는 것이 그저 두려울 따름이다.

'열심히 살았다'는 변명만으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 1945년 1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해방시키고 발견한 유대인 여성들의 머리카락 뭉치. 밧줄 등을 만드는 데 쓰였던 이 머리카락 뭉치의 무게는, 발견된 것만 7톤에 이르렀다.
ⓒ 범우사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분에게 <고백록>은 하나의 참고 자료가 될 법하다. 아우슈비츠에서 일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돼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1차 대전에 참전한 경험과 전후 나치당에 입당한 내용 등도 담겨 있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헤스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다른 나치 인사들에 대한 일화도 담겨 있어 나치당 내부를 살피는 데도 참고할 만하다.

필자가 <고백록>을 읽으며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을 떠올린 것처럼 '조직과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이 책을 바라볼 수도 있다. 몇 해 전 미국을 뒤흔들었던 엔론 사태는 수많은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학살한 셈인데도, 정작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들 정당한 경영행위였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인간은 조직의 권위를 거스르기 어렵고 대개 조직은 부당한 행위라도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개인을 다그친다. 그러나 작은 영수증 처리에서 인류 앞에 씻기 어려운 대학살 범죄까지, 경계해야 할 함정은 늘 도사리고 있다. 단지 열심히 살았다는 변명만으로 지나칠 수 없다.

▲ 1946년 3월 영국군에 체포된 헤스는 폴란드 최고인민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47년 4월 16일 아우슈비츠에서 처형되었다.
ⓒ 범우사

덧붙이는 글 |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헤스는 독일어 발음으로 본다면 '회스'에 가깝다고 합니다. 출판사에 따르면 최근 방송 다큐멘터리에서 '헤스'로 나왔고 몇몇 책에도 '헤스'로 표기되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 '헤스'로 적었다고 합니다. 롬멜 장군도 최근엔 '로멜'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 발음에 가깝게 불러준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기존 자료와 혼동을 주고 검색에 어려움을 준다는 부정적인 면이 함께 있습니다. 이러한 장단점을 고려해 출판사와 번역자들이라도 나나서 롬멜과 로멜, 헤스와 회스 같은 문제에 대한 최적의 합의점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헤스의 고백록

루돌프 헤스 지음, 서석연 옮김, 범우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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