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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지역, 부다왕궁 근처 어느 건물 벽에 조각된 베토벤
헝가리 부다지역, 부다왕궁 근처 어느 건물 벽에 조각된 베토벤 ⓒ 조명자
1983년 결혼식을 끝내고 강릉 경포대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우리는 축의금 120만원으로 신접살림을 차렸다. 피차 없는 처지에 혼수가 웬 말이냐? 배짱이 두둑했던 나는 냉장고 하나에 장롱 하나만 달랑 들고 시집이란 걸 왔으니 신접살림 정리하고 말 것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다음 날 남편이 잠시 사라지더니 손에 무슨 박스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다른 건 몰라도 FM 나오는 라디오 하나는 있어야 될 것 같아서….”

알고 보니 남편은 자타가 공인하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날이면 날마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새벽을 시작하는 것은 물론 집에 있을 때면 습관처럼 라디오를 틀어놓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격조 높은 문화수준과는 담쌓은 나. 당연히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잇, 시끄러워 죽겠네. 당신이 라디오를 하도 틀어대니까 잠을 잘 수 없잖아.”

고등학교 때 선생님 댁에서 클래식 음악을 섭렵했던 남편은 콘닥터가 꿈이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마누라가 알만한 클래식은 중고등학교 음악책에 나와 있던 슈베르트의 가곡,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정도였고, 아주 즐겨 부르던 노래도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부류다. 자, 부부의 기호 차가 이 정도일진대 우리 부부의 사는 꼬라지가 '안 봐도 비디오'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 나는 베토벤에 빠져 있다. 우리 남편이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음악가 베토벤. 그 머리가 하도 곱슬거려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조차 인상착의를 정확히 기억하는 악성 베토벤. 그를 만난 것이 작년쯤이다.

어느 날 우연히 틀었던 TV 프로에서 금난샌가 하는 지휘자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일명 <황제>를 들려주며 곡 해설을 하는 것이었다. 웬일이었을까? 음악을 듣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저려오는 느낌이 밀려들면서 말할 수 없는 충격이 전신을 흔들었다. "이게 뭐지? 이 곡이 뭐지?" 하는 문화적 충돌. 그 감동은 50평생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던 음악에 대한 새로운 충격이었다.

듣고 싶었다. 더 듣고 싶었다. 충파 레코드점으로 달려갔다. 클래식 CD가 그리 많지 않아 이것저것 고를 여지도 없어 그냥 어디 오케스트라인지, 피아니스트와 지휘자가 누군지 확인도 않고 무조건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만 골랐다. 어차피 귀 명창하고는 거리가 머니 연주자 실력을 구분할 처지는 아니지 않는가.

클래식만 틀면 맨날 시끄럽다고 타박만 하던 마누라가 베토벤을 자청해 찾다니. 남편은 마누라의 새로운 모습에 감동, 감동이었다. 자상하게 베토벤의 음악에 대해 개괄을 해주더니 해외출장 갔다가 선물 받아 온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CD를 들고 내려왔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준이 뉴욕 필 못지 않다는 평이야. 자꾸 듣다 보면 지휘자에 따라 곡 해설이 어떻게 다른지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열심히 들어보라고."

차만 타면 볼륨을 사정없이 키우고 음악 감상을 시작했다. 1악장, 영혼을 뒤흔드는 격정적인 피아노 연주를 시작으로 오케스트라 관현악기의 웅장한 화음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 오감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우는 것 같았다.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채 피어보지도 못했던 내 청춘의 열정이 다시 살아 돌아온 듯한 환희.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그라들었던 열정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 내 젊은 날의 꿈과 사랑을 불러온 것 같은 착각에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도 사랑도, 꿈조차도…. 듣고 또 들어도 늘 똑같은 감동, 음악이란 게 이렇게 질리지 않을 수도 있구나 처음으로 안 사실에 내 남편이 왜 이렇게 클래식에 심취하는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내 심장을 쥐고 흔들며 세포의 마디마디 그 미세한 흔들림까지도 모아모아 환호를 외치던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이 시작됐다. 느리고 고운 바이올린 선율, 격정을 넘어 고요로 마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모습처럼. 2악장은 내게 욕심을 버린 사물의 평화가 어떤 모습인지 되돌아보게 하는 것 같았다.

오욕을 벗어나 나와 남을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황혼기의 편안함. 나 자신을 천착하고 관조할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이 짧은 선율 속에 담뿍 담아 있다면 지나친 오버센스일까? 하여튼 그 고요함과 격조 높은 품위 속에 나는 천상병의 <귀천>을 떠올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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