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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추리 입구에서 하추분교로 향하는 길. 300m 가량 도로가 유실됐다. 왼쪽편은 낙석이 우려된다.
하추리 입구에서 하추분교로 향하는 길. 300m 가량 도로가 유실됐다. 왼쪽편은 낙석이 우려된다. ⓒ 유성호
물막이 담장이 부서져 강 한가운데 처박혀 있다.
물막이 담장이 부서져 강 한가운데 처박혀 있다. ⓒ 유성호
허탈한 주민들 "폭우가 마을 지도 바꿨다"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이하 봉사단)이 수해 현장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동행했다. 17일 오후 6시 30분 서울을 출발한 차는 밤 10시경 강원도 홍천에 도착했다. 19명으로 구성된 구호봉사단은 10t 물량의 구호품과 1000여만원의 구호자금을 챙겨 현장으로 출동했다.

봉사단은 홍천을 거처 인제군 일대 수해현장으로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낙석으로 곳곳이 깨진 31번 국도를 야간에 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홍천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인 18일 일찍 차를 몰아 인제군청에 차려진 인제군 재난안전대책본부에 들러 피해 상황을 확인했다.

재난대책본부에 따르면, 17일 자정을 기준으로 인제군 일대에서만 39명의 인명피해(사망 12명, 실종 27명)가 있었다. 이재민은 4개 읍면 15개 리에서 773명이 발생해 수용 시설과 인근 주택에 대피해 있는 실정이었다. 집도 전파 63채, 유실 28채, 반파 72채, 침수 154채, 매몰 2채, 화재 2건 등 모두 321건의 피해가 발생했다.

봉사단은 인제읍 덕적리(140명)에 이어 두 번째로 이재민이 많이 발생한 하추리(115명)를 찾았다.

이날도 인제에는 비가 내렸다. 더구나 인제군청에서 하추리로 들어가는 도로는 곳곳이 유실되거나 토사에 뒤덮여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다.

가리산 줄기 밑에 위치한 하추리. 아래 하(下), 가래나무 추(楸)를 쓰는 이 마을 산에는 호도와 비슷한 가래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번 폭우에는 가래나무도 마을을 지키지 못했다. 가리산천이 흐르는 지역의 마을은 여지없이 급류에 휩쓸려 이재민과 재산피해를 냈다.

물길이 꺾이는 바깥쪽에 있던 집들은 여지없이 쓸려 날아가거나 토사에 파묻혔다. 그동안 어렵잖게 물살을 막아내던 담벼락은 맥없이 떨어져 나가버리고 그 뒤에 있던 집들은 아수라장이 됐다.

밀려들어 온 토사는 물길을 제멋대로 틀어 놨고 밭을 모두 쓸어갔다. 마을 주민들은 입을 모아 지도가 바뀌었다고 한탄했다.

하추리 입구에 있는 하추리 식당에는 이 지역 수재민들이 만든 주민대책본부가 차려져 있었다. 박재균 이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주민대책본부는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 맞는 수해에 매우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50m 가량 유실된 도로. 이 곳을 지나려면 옆길을 아슬아슬하게 가야 한다.
50m 가량 유실된 도로. 이 곳을 지나려면 옆길을 아슬아슬하게 가야 한다. ⓒ 유성호
유실된 도로 안쪽에는 엿가락처럼 휜 가드레일과 가로등, 전봇대가 쓰러져 뒤엉켜 있고 아스팔트 조각이 널려져 있었다.
유실된 도로 안쪽에는 엿가락처럼 휜 가드레일과 가로등, 전봇대가 쓰러져 뒤엉켜 있고 아스팔트 조각이 널려져 있었다. ⓒ 유성호
하추리 식당 앞은 소양강 내린천과 가리산천이 합수되는 지점으로 물살이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다리 교각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로누워 걸려 있고 그 사이로 물살이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상판에는 토사와 나뭇가지가 뒤엉켜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등 범람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직접적인 수해를 입은 계곡마을까지는 길이 끊어진 상태. 하루 이틀 작업으로 복구될 상황이 아니었다.

물길이 세차게 지나는 곳에는 두께 20㎝ 콘크리트 옹벽이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물살에 실려 떠내려 온 집채 만한 바위가 옹벽을 깨고 뒤이어 들이닥친 물살이 토사를 갉아냈다. 토사가 지지하고 있던 아스팔트 도로는 종잇장처럼 찢어지며 무너졌다.

도로가 붕괴되면서 도로변에 서 있던 가로등과 전봇대도 모두 쓰러졌다. 전봇대는 연결돼 있는 억센 전깃줄 때문에 하나가 쓰러지자 줄줄이 뽑히거나 부러지면서 동강났다. 이 때문에 일대는 며칠간 계속 정전 상태에 있다.

두 동강난 전봇대. 하나가 넘어지면 도미노처럼 잇달아 쓰러지면서 부서진다.
두 동강난 전봇대. 하나가 넘어지면 도미노처럼 잇달아 쓰러지면서 부서진다. ⓒ 유성호
구호키트를 만들고 있는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
구호키트를 만들고 있는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 ⓒ 유성호
한 주민의 '비상대피령', 인명 피해 막아

이재민들은 마을회관과 지금은 폐교가 된 남인제 초등학교 하추분교에 수용돼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은 이미 접었고 먹을거리라도 충분히 공급되길 바라고 있었다.

하추분교에는 약 30여명의 이재민이 수용돼 있었다. LP가스가 바닥나 취사를 할 수 없어 이들은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대부분 주민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아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서다. 괜한 말 한 마디가 이런 상황에선 쉽게 상처가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 김순자씨는 "가리산천 상류지역에는 다행이 인명 피해는 없지만 죄다 쓸려 사라져 숟가락 하나 못 건졌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비로 모두 휩쓸려가고 남아 있는 건 강원도 인심뿐"이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추분교에 마을 주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놀러왔다 수해를 만난 관광객 30여명도 고립돼 하룻밤을 떨면서 지새우다가 이튿날이 되어서야 걸어서 빠져나갔다고 한다. 남겨진 관광버스 때문에 운전기사는 아직 하추리에 남아 도로가 복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하추리에는 인명 피해가 없었다. 일 때문에 가리산천 상류를 찾았던 김군호(청·장년회 부회장)씨가 급격히 물이 불어난 것을 보고 하류 쪽으로 차를 몰아가며 비상사태를 다급히 알렸기 때문이다.

윤종남 청·장년회 회장은 "마을 앞 성황당 옆 수백 년 된 돌무덤이 이번 수해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서 "어르신들도 이런 물난리는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하추리 박재균 이장도 "1984년에 조그만 물난리가 있었지만 평생 이런 물폭탄은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박 이장은 "현재 주민들이 100% 복구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삽, 괭이, 리어카 등 개인 복구장비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구호키트를 등에 지고 왕복 8㎞ 거리에 있는 이재민 수용소까지 서너차례 왕복하면서 구호작업을 펼치고 있는 봉사단과 주민들.
구호키트를 등에 지고 왕복 8㎞ 거리에 있는 이재민 수용소까지 서너차례 왕복하면서 구호작업을 펼치고 있는 봉사단과 주민들. ⓒ 유성호
동강난 전봇대가 도로 위에 나뒹굴고 있다.
동강난 전봇대가 도로 위에 나뒹굴고 있다. ⓒ 유성호
비가 하루 종일 퍼부은 18일, 봉사단과 하추리 주민들은 고립된 이재민을 위해 합심해서 구호키트를 날랐다. 주민대책본부에서 이재민이 모여 있는 하추분교까지 왕복 약 8㎞ 길을 오로지 맨손으로 구호품을 날라야 했다.

아주머니들은 구호키트를 머리에 이고 청년들과 봉사단은 둘러맸다. 청년회라고 해야 모두 40~50대 아저씨들이다. 이들은 끊긴 도로 옆 산길을 등산하듯 아슬아슬하게 탔다. 빗물을 머금은 돌무더기는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게 위험하게 매달려 있었다. 피해가 없는 주민들도 모두 나와 구호에 손을 보탰다.

구호키트에는 햇반, 컵라면, 초코파이, 빵, 우유, 옷가지, 속옷, 커피, 고무장갑, 화장지, 여성용품까지 고립지역에서 한 사람이 이틀 정도를 버틸 수 있는 필수품이 들어 있다. 쌀은 항공지원을 요청했지만 일기가 좋지 않고 착륙할 곳이 마땅찮아 안타깝게 무산됐다.

하추분교보다 상류지역인 마을회관에는 생후 2개월이 채 안 된 갓난아기를 비롯해 영아들이 분유가 떨어져 부모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구호팀은 급히 인제군 시내에서 아기들이 필요한 분유, 물티슈, 기저귀와 이재민들 위한 쌀 50포를 지원했다. 또 전기 발전기를 지원해 전기공급을 가능케 했다.

하추분교에 대피해있는 한 주민이 구호키트를 반갑게 받아들고 있다.
하추분교에 대피해있는 한 주민이 구호키트를 반갑게 받아들고 있다. ⓒ 유성호
인제운동장에는 구호 헬기가 쉴새없이 뜨고 내렸다.
인제운동장에는 구호 헬기가 쉴새없이 뜨고 내렸다. ⓒ 유성호
집은 떠내려갔어도 인심은 남아

주민들은 비가 그치길 기다렸지만 이날 자정을 넘겨서까지 비가 내렸다. 다행스럽게 다음날인 19일 새벽 비는 그쳤고 날이 밝자 복구작업과 각급 봉사단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하추리 입구의 하추교 밑에서 대형 포클레인과 12t 트럭이 굉음을 내며 토사를 걷어내고 물길을 다듬는 분주한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누더기처럼 유실된 31번 국도 전역에서 도로정비 작업을 하고 있는 등 복구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춘천성심병원에서도 무료진료팀을 보내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한편 하추리에서 이틀간 재난 구호활동을 벌인 봉사단은 인근 인제군 기린면으로 이동, 기린면사무소에 구호키트 60여박스를 전달했다. 봉사단은 또 인제 체육관으로 옮겨 헬기를 통해 구호키트 50박스와 쌀 50포대를 고립지역으로 보냈다.

봉사단을 이끈 조현삼 목사는 "작은 힘을 보태서 이재민들이 힘을 내는데 도움을 주고자 왔다"며 "주민들이 하루빨리 수해의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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