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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하나비 대회 모습 -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젊은 연인들로 붐빈다. 하나비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술에 취해 여름밤을 보내는 것은 일본 특유의 풍경이다.
도쿄의 하나비 대회 모습 -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젊은 연인들로 붐빈다. 하나비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술에 취해 여름밤을 보내는 것은 일본 특유의 풍경이다. ⓒ 이병한
내리쬐는 햇살이 뜨겁다. 후덥지근한 공기로 숨이 턱턱 막힌다. 하나비(花火)의 계절, 여름이 온 것이다.

검푸른 하늘을 캠퍼스로 삼아 펼쳐지는 휘황찬란한 불꽃 향연. 무더운 여름밤을 눈 시린 아름다움으로 밝히는 하나비는 '불의 예술'이라 칭해도 조금의 모자람이 없다. 게다를 신고 유카타를 차려입은 채 친구와 연인, 가족들과 하나비 대회를 즐기는 왁자지껄한 모습은 일본 열도에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풍경이다.

7, 8월이면 일본 전역에 하나비 축제가 열리고, 각 지역마다 그 고장만의 독특한 하나비를 뽐내곤 한다. 미국의 디즈니랜드에서 한여름 밤을 수놓고 있는 불꽃놀이도 실은 하나비일 만큼, 일본의 하나비는 역사도 깊고 명성도 자자하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불꽃놀이를 즐긴 나라는 중국이다. 불꽃놀이의 필수품인 화약을 최초로 발명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을 거쳐 유럽으로 전수된 화약은 전쟁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고 말았다. 화약 기술을 전수를 받은 유럽은 대륙 전체가 전란에 휩싸였고, 총과 대포를 앞세워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어 갔다.

몽고군의 원정기에 일부 전파되었던 화약 기술이 일본에 폭넓게 보급된 것은 포르투갈 군함의 난파 덕분이었다. 이때 전래된 유럽의 소총과 대포 등의 화약 기술은 일본 열도 전체를 전국 시대의 혼란으로 빠지게 만든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이 아비규환의 시대를 평정하고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화력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임진왜란 패배 이후 일본은 이른바 '쇄국 정책'을 취하면서 평화로운 에도 시대로 접어든다. 평화가 찾아들자 '하나비의 시대'가 만개했다. 전쟁에 필요했던 화약의 수요가 줄어듦에 따라 화약을 다루었던 장인들이 심미적인 여흥의 도구로써 하나비 연구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즉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 하나비는 전란 시대의 종식과 평화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물과도 같았다.

막부의 중심지였던 에도에서 각광을 받았던 하나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민들의 대표적인 유흥으로 자리 잡아갔다. 전기와 전등이 없던 당시의 칠흑 같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불꽃잔치는 일종의 마법과도 같았으리라.

오다이바의 레인보우 브릿지에서 - 화약 폭발의 위험성 때문에 강가와 바닷가에서 하나비를 즐겼던 것이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다이바의 레인보우 브릿지에서 - 화약 폭발의 위험성 때문에 강가와 바닷가에서 하나비를 즐겼던 것이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이병한
지금처럼 시야를 가리는 고층 건물이 없는 확 트인 평지에서 바라보는 하나비의 향연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전쟁 도구의 하나였던 화약을 하나비에 이용하는 데에는 늘 화재의 위험이 따라다니곤 했다. 실제로 에도 시대의 문헌에는 적지 않은 사고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하나비 대회가 강가나 바닷가에서 열리는 것도 화재 예방을 위한 당시의 방안이 하나비의 전통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근대 국가로 거듭났던 메이지유신은 하나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의 문물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문명화의 시대에 새로운 과학 기술의 도입은 하나비의 질적 도약을 가능케 한 것이다. 에도 시대까지만 해도 하나비는 화약 폭발시의 세기를 조정해서 불꽃의 농담을 조절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회화로 비유하자면 '수묵화의 시대'였던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에서 수입한 마그네슘과 칼륨 등 각종 화학 약품을 응용하게 되면서 하나비는 비로소 빛의 농담에다 색채마저 가미한 '채색화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 최초의 컬러판 하나비가 제국헌법이 발포된 1889년 2월 11일 밤에 선보였음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즉, 한층 화려하고 강렬해진 하나비 그 자체가 눈부시게 발전해 가는 메이지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는 곧 제국주의로의 변화이기도 했다. 다이쇼기를 거쳐 쇼와기에 이르러 하나비는 다시 암흑시대를 맞이한다. 화약 기술이 또 한 번 전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일본의 군부는 총력전 체제 속에서 화약을 아끼기 위해 하나비를 통제했다. 서민들의 일상적 오락이었던 하나비마저 당국의 허락 없이는 즐길 수 없었을 만큼 당시의 군국주의는 서슬 퍼랬고, 가혹하기만 했다.

장인인 동시에 예술가이기도 했던 하나비 종사자들도 점점 전쟁 수행의 일원으로 동원되어 갔다. 하나비는 축제가 아니라 군인들의 출정식이나 전사자들의 귀환 행사에 쏘아 올려졌고, 일부는 전쟁을 선동하는 영화의 특수 효과를 담당하는 스태프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가장 크고 화려한 하나비 대회는 봄과 가을,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야스쿠니 신사에서 열리곤 했다. 하나비가 최초로 외국의 밤하늘을 가른 것도 일제의 괴뢰 정부였던 만주국의 하얼빈에서였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은 하나비보다 더 강렬한 섬광으로 대일본제국의 패망을 알렸다. 그러나 패전은 평화로운 전후 일본의 개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패전 후 처음 열린 하나비 대회는 미국 점령군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7월 4일, 전승국 미국의 독립 기념일에 쏘아 올린 하나비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심정은 참으로 복잡했을 것이다.

일본의 급속한 우경화로 '평화 헌법'도 위기에 처했다.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하나비 대회가 전면 금지되었던 지난 세기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간다.
일본의 급속한 우경화로 '평화 헌법'도 위기에 처했다.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하나비 대회가 전면 금지되었던 지난 세기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간다. ⓒ 이병한
일본인을 위한 전후 최초의 하나비는 1947년 5월 3일에 열렸다. 신헌법 시행을 기념하는 국민적 축제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신헌법'이란 영구히 전쟁을 포기함을 선언한 평화 헌법을 말한다. 전쟁의 악몽을 진저리치게 경험했던 당시의 일본인들은 폭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던 도쿄 하늘에, 다시 하나비가 만발하는 걸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후 중국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 동아시아가 온통 화약 냄새로 진동할 때에도 일본만은 신헌법 속에서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다.

이후 하나비는 경이적인 고도 성장기와 함께 나날이 화려해져 갔다. 독자적인 화학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금속 약품의 발명으로 하나비의 아름다움을 배가시켰으며, 그 빛과 색의 조화와 형태도 한층 다채로워졌다. 유흥을 넘어 예술의 수준으로까지 도약한 것이다. 일본 열도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이 즈음이다. 전후 일본은 하나비의 천국이었다.

화약은 잔인무도한 전장의 무기가 되어 핏빛으로 물들 수도 있고, 평화를 상징하는 불꽃이 되어 밤하늘을 아름드리 수놓을 수도 있다.

올해도 수많은 일본인들은 무더운 여름밤의 밤공기를 시원스레 가르는 하나비를 보기 위해 강가로, 바다로 몰려들 것이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취해 친구들과 가족간의 정도 깊어지고, 연인들의 사랑은 한층 농익으리라.

그러나 일본의 그 '평화 시대'는 종점에 달한 듯하다. 지난 6월 미-일 군사 일체화를 확립한 고이즈미 총리는 미국으로의 '밀월여행'에서 미-일 동맹의 신 단계를 선언했다. 미국과 함께 일본의 자위대가 전 지구적으로 활약할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올해만큼은 하나비의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기보다는 평화에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보도록 하자. 성큼성큼 다가오는 전쟁의 시대를 단호히 거부하는 결연한 의지도 함께 담아서 하나비를 쏘아 올리자.

덧붙이는 글 | 일본 교민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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