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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어느 날, 나는 어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경북 군위군에 있는 인각사에 간 적이 있다. 모임을 끝내고 경내를 둘러보다가 대웅전 앞에 얼굴 모양이 다 이지러져가는 석불 한 기를 만났다.

이목구비가 다 스러져가는 돌부처를 보다가 문정희 시인의 시 한 편을 떠올렸다. 그 시는 제16회 정지용 문학상 당선작인 '돌아가는 길'이다. 나는 이 작품을 감동적으로 읽고, 곧바로 지역 신문에 다음과 같이 전문과 감상문을 발표한 바 있다.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 '돌아가는 길' 전문.


우리나라 중견 여성 시인 문정희의 제16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이다. 인각사는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다. 고려 충렬황 때 일연 선사가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서술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인각사(麟角寺)라는 이름은 절 앞 내(川) 건너 깎아지른 듯한 바위에 기린이 뿔을 얹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한다.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모양이 다 이지러져 가는 석불 한 분을 본데서 문정희 시인은 돌아가는 길(道)의 진리를 발견한다.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말 속에 내재된 돌아감의 진리, 그것 말이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는 순간, 마지막 흔적 속에 이루어지는 ‘완성’의 찰나를 훔쳐본 시인이 토해내는 그 말씀은 깊고도 그윽하다.

그것은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는 깨달음으로 정리될 수 있다. 우리도 끝내 우리가 돌아가는 길을 보려고 마음공부를 크게 해야 하리라.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타인에게 원한을 쌓지 않는 일에서, 나를 버리는 일에서 그 공부는 시작되리라.

이 시를 읽고 난 후, 나는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 문정희 시인의 최근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를 구입해 읽었다. 1969년에 등단한 그는 37년 이라는 시력에 걸맞게<문정희 시집> <남자를 위하여> 등 10여 권의 시집과 시선집 <어린 사랑에게> 외에 시극 <구운몽> <도미> 그리고 다수의 산문집을 펴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과 레바논에 본부를 둔 나지 나만 문학상(naji naaman's literary prizes)을 수상한 문정희 시인은 한국시단의 중견 여성 시인이다.

아침에 샤워를 하며
알몸에게 말한다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마라
내가 시인이라 해도
너까지 시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제 나는 하루에 세 살을 더 먹었다
문득 그랬다
이제 백 년 묵은 여우가 되었다
그러니 알몸이여, 너는 하루에 세 살씩 젊어져라
너만큼 자주 나를 배반한 적은 없었지만
네 멋대로 뚱뚱해지고
네 멋대로 주름이 생겼지만
나의 시가 침묵과 경쟁을 하는 사이
네 멋대로 사내를 만났지만
그래도 그냥 너는 알몸을 살아라
책상보다 침대에서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싱싱하게
나의 방앗간, 나의 예배당이여
- '다시 알몸에게' 전문.


문정희의 시는 정직하다. 정직한 어법으로 여성의 몸과 생명의 이법(理法)을 노래하고 있다. 위선과 가식의 가면을 벗겨내고 순수한 알몸을 노래하는 그의 시는 솔직하고 건강하다.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다시 알몸에게'는 “책상보다 침대에서/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싱싱하게”라며 알몸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직설적인 그의 시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발랄하고 대담한 상상력으로 독자의 가슴을 싱싱하게 만들어 준다. 이는 곧 몸의 생명력이 품고 있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본능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또 문정희의 시는 생의 비의(秘儀)와 삶의 서늘한 그늘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율포의 기억)를 알고 있고,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를 들을 줄 아는 시인이다. 매주 수요일 정오, 서울 안국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흰옷 입은 종군위안부 여성들이 벌이는 시위를 담아내고 있는 시 '딸아 미안하다'는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나는 문정희 시인이 갖고 있는 도시적이고 세련된 외양의 이미지 때문에 여태 그의 시를 모르고 지냈다. 그의 시집을 읽는 지난 며칠 동안 무더운 한여름 날씨도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문정희 지음, 민음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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