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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붉은색과 노란색의 기가 열두 폭. 맨 앞 붉은 깃발에 '관(官)'이라 쓴 글이 보이니 분명 관인의 행차가 분명했다. 거기다 마차가 아닌 승교(乘轎)를 탔으니, 그 지위 또한 낮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승교를 든 인원만 여섯이오, 말을 탄 인물만 다섯 명, 좌우로 늘어선 호위만 해도 이십 여명이 되었으니 정오품(正五品) 정도의 위세다.
더구나 그들의 모습으로 보건 데 꽤 오랜 여정인 것 같다. 마차를 타지 않고 승교를 탔음은 승교를 타고 있는 자가 매우 까다로운 성미를 가졌음을 의미했다. 높은 관직에 있다 해도 먼 길이라면 아래 사람들의 고생을 보아 마차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임에도 승교를 고집하고 있음은 마차와 같은 덜컥거림이 있는 것을 참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언뜻 휘장이 바람에 날리자 승교를 타고 있는 기이한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사내 얼굴에 옅은 화장(化粧)이라니…. 환관(宦官)이었다.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래 그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쳐들지 못했던 환관의 무리들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기 시작했다. 불알 없는 서러움을 세상에 화풀이라도 하듯 그들은 처음 재물에 욕심을 내어 뇌물을 받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더니, 어느 순간부터 정치와 권력에 맛을 들여 관직에 탐을 내었다.
황제의 절대 권력에 기생해야 하는 그들은 어느새 황제마저 우습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관직의 요소 요소에 자신들에게 아부하는 자들만이 득세하게 만들었다. 태조가 대명을 세운 후 궁문에 철패(鐵牌)를 세워 환관의 정치 간섭을 금하였지만, 그것은 태조의 넷째 아들인 영락제부터 유명무실화 된 터.
영락 18년에 동창(東廠)이 정식으로 모습을 보이고 그 실권이 환관에게 주어지자, 그로 인하여 국법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신(朝臣)들을 국문하는가 하면, 살해하는 일까지 빈번히 자행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황제의 지(旨)도 사례감(司禮監)의 환관이 이미 항목(項目)을 정한 뒤 내각에게 넘겨 초고(草稿)를 작성하게 하자 사례감의 권력은 재보(宰輔)를 능가하게 되었다.
아무리 유능한 각신(閣臣)이라 해도 환관과 결탁하지 않으면 자리를 보전하기 어렵고, 환관들의 눈에 벗어나면 모함을 받아 물러나거나 역신(逆臣)으로 몰려 처형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영종(英宗) 시기의 왕진(王振)이 그 좋은 예로 대명의 기운이 왕진에 의해 꺾였다는 말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 후에도 무능한 황제들은 왕직(汪直)과 유근(劉瑾) 등과 같은 환관들의 득세를 감싸고, 당대에 이르러서도 위충현(魏忠賢)의 권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동창을 이용해 전횡을 일삼고 대학자나 조신 중 그를 시기하는 자들을 모두 하옥하거나 살해해 결국 작금의 사직(社稷)까지 위태롭게 만든 지경에 이르게 하고 있는 터. 지금도 그를 비롯한 환관들의 위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서당두(徐檔頭). 아직 멀었나?"
당두(檔頭)는 동창에 있는 정식 관직의 명칭. 동창을 관할하는 제독동창(提督東廠) 아래 두 명의 첩형(貼刑)이 있고, 그 밑에 백 명의 당두(檔頭)가 있으며, 내려가면서 번역(番役)이란 직책을 가진 자도 천여 명. 번역 아래의 관원은 금의위(錦衣衛)나 군문(軍門)에서 선발되었으니 당두란 직책은 환관이 아니더라도 위세를 부릴만한 자리다.
그런 관헌의 호위를 받을 정도니 이 승교 안에 타고 있는 불알 없는 환관 놈은 필히 손끝 하나로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있을 터. 승교 전면에서 말을 타고 나아가는 자가 급히 말머리를 돌려 승교 옆쪽으로 달라붙었다.
"이제 일각만 가시면 도착하게 됩니다. 그곳에는 이미 마중 나온 자들이 있을 겁니다."
"꼭 배를 타야하는가?"
사실 처음부터 배를 탔으면 오히려 이리 돌아오는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승교를 메는 자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이 사십이 갓 넘은 놈이 왜 그리 의심은 많고 배를 싫어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뻔히 보이는 거리이니 숨 몇 번 몰아쉬면 내리시게 될 겁니다. 예로부터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抗)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배에서 보는 서호(西湖)의 절경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본관은 배가 싫어."
사내란 놈이 아무리 불알을 잘랐다 하나 투정부리듯 말하는 콧소리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이들과 함께 지낸 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그런 말투에는 익숙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내색할 수는 없는 일. 그는 대꾸 없이 미소를 띠고는 천천히 전면으로 나아갔다.
당두에 까지 올라 일개 환관의 호위를 한다는 것은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동창이란 조직도 군문과 같아서 일단 위에서 내려 온 명령에는 이유를 달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번 일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운중보(雲中堡)는 언제고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8.
서호의 절경은 중원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곳. 초록빛을 띠는 물색과 기기묘묘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가 하면 절벽에 붙어 사선처럼 걸려있는 청송(靑松) 역시 한 폭의 그림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절경은 밤에 이루어진다. 항주(抗州)는 본래 색향(色鄕)으로 이름난 곳. 밤마다 노류장화(路柳墻花)들의 화방(花舫)들이 물가로 빼곡하게 몰려있는 광경은 또 하나의 볼거리요, 형형색색의 등불을 켜고 은밀한 수작이나 숨소리가 또 하나의 색다른 풍취다.
하지만 지금 서호 나루터에 정박해 있는 선박은 오밀조밀한 서호의 풍경과 매우 이질적인 느낌이 들게 했다. 정교하게 용두(龍頭)가 조각되어 그 위세를 떨치고, 마치 별원을 꾸며 놓은 것 인양 화려한 이장선(二檣船)이었지만, 그리고 그 모습 하나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히 큰 배였지만 동정호(洞庭湖)라면 몰라도 서호에 이리 큰 선박은 사실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배에 걸린 깃발 안의 글씨만 아니었다면 이런 큰배를 띄운 자들에게 미친놈들이라 욕설이라도 했겠지만, 누구도 그 글씨를 보고 난 다음이라면 고개를 숙일망정 허튼 소리를 할만한 담력을 가진 자는 없었다.
운중(雲中)
조그만 배 몇 척을 띄운 후 갑판처럼 생긴 널빤지를 깔아 연결한 부교(浮橋)는 꽤 길었지만 마차라도 선박에 실을 정도로 튼튼하고 넓었다. 이미 배 위에는 손님이 탔는지 꽤 많은 인원이 갑판 위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보였고, 부교 위에서는 탑승을 점검하는 선원 둘과 삼십대 전후로 보이는 잘생긴 인물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이 배는 오직 운중보에 가는 것이오."
일개 선원이라 했지만 말투나 태도가 범상치 않다. 구릿빛 살결에 드러난 팔뚝은 힘깨나 쓰는 자 같았다.
"나 역시 운중보로 가는 길이니 분명 잘못 타는 것은 아니오."
어디서 멋 부리는 것을 귀동냥했는지 모르지만 사내는 일단 보기에 풍류남아로 보였다. 문사 풍의 의복에 발에는 새로 만든 하얀 바닥의 관화(官靴)를 신었고, 제법 그럴듯한 합죽선(合竹扇)까지 들었으니, 영락없이 좋은 집안에 태어나 걱정 없이 글귀나 읊조리고 다니면서 여자나 후리는 한량(閑良)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의 외모 또한 한몫을 거들만큼 미남자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얼굴선이 마치 목각을 깎아 만든 것처럼 반듯하고 시원시원했다. 어지간한 처자(妻子)라면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만 귀밑에서 목까지 옅은 상처가 그어져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본 보에서는 청간(凊柬:초대장)이 없는 분은 들일 수 없소이다. 명첩(名帖)이라도 주신다면 윗분께 말씀드려 보겠소. 모실 분이라면 내일이라도 모시러 오겠소이다."
선원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하고 있었다. 한량처럼 보이기는 하나 그 꾸밈새나 은근히 풍기는 기품이 그냥 내치기에는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안다면 그에 따라 대응할 생각이었다.
"허…,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하는 소생이 무슨 명첩이 있겠소. 하지만 어려서부터 귀 보주를 흠모하던 차에 그 분의 회갑연이 있다 해서 부랴부랴 들른 것뿐이오."
선원의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겉모습은 그럴 듯 해 보이기는 하나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어디가나 있다. 자신들의 할 일도 이런 자들을 골라내는 것이었고, 운중보가 어떤 곳인데 이런 어중이떠중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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