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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
겉표지 ⓒ 현대문학
<용의자 X의 헌신>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게임의 룰을 뒤집어엎었다. 놀라움을 넘어 이색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초반부터 범죄가 일어나는 상황과 범인을 알려주고 있다. 조커를 내려놓은 뒤에 게임을 시작하겠다는 것이니 참으로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작품은 어떻게 전개될까?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세 명. 첫 번째는 전남편을 죽인 여자다. 여자는 당장에라도 자수하고 싶지만 경찰이 딸에게까지 죄를 물을까 걱정돼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한 채 전남편의 시체만 보고 있다. 그때 두 번째 인물이 등장한다. 이 여자를 사랑하는 천재 수학선생이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 나머지, 살인을 은폐시킨다. 더불어 치밀한 작전으로 경찰이 사건의 진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덫을 만들어 견고한 방어막을 구축해낸다.

세 번째 인물은 경찰 친구 덕분에 이 사건에 끼어든 천재 물리학자다. 본래 물리학자는 사건에 끼어들 마음은 없었다. 그보다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대학 동창, 즉 수학선생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범죄현장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런데 이것이 사건에 이끌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천재가 천재를 알아보듯, 물리학자는 이 사건에 '강적'이 있음을 눈치 채고 성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게 된다.

등장인물들의 구도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가 조커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수학 선생과 물리학자의 대결 때문이다. 작품이 깊어질수록 사건의 첫 번째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경찰의 존재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초점은 수학 선생과 물리학자의 방어와 공격으로 모아진다. 그 대결은 가히 용호상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덕분에 <용의자 X의 헌신>은 조커를 내려놓았음에도 흥미진진함을 잃지 않는다. 누가 이길지 추측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박빙의 대결이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승부는 예상 외로 쉽게 결정 난다. 수학선생이 애당초 물리학자가 이 사건에 참여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를 찔린다. 모든 방어막들은 일반 경찰을 대상으로 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수학선생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리학자가 이겼다는 것을. 그리고는 사건의 전말을 공개한다.

그런데 그것은 뭔가 이상한 고백이다. 사건과 맞지만, 동시에 사건과 맞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모순된 말이지만 사실이다. 밝혀진 경찰 조사와 거짓된 고백은 컴퓨터 데이터처럼 일치한다. 그러나 진실이 아닌 것이다. 물리학자는 당황한다. 그리고 이 또한 수학 선생이 준비한 방어막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때부터 작품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용의자 X의 헌신>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답게 빠르고, 또한 흥미진진하다. 조커를 내려놓았음에도 만만히 볼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부차적인 감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진짜는 무엇일까? 그것은 물리학자가 의문을 가지는 것처럼, 여자에 대한 수학 선생의 일편단심에서 비롯된다.

간략하게 살펴본 위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수학선생은 여자의 살인을 덮어주기 위해 모든 수를 다 쓴다. 그 정성이라는 것이 물리학자마저 인정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걸까? 여자도 느끼는 것이지만, 짝사랑한다고 해서 그 정도까지 해주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어쨌거나 저질러진 범죄고 어떻게든 발견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관심의 전부일 테니까 말이다.

그건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보는 이도 그렇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독자'를 '여자'의 위치에 서있도록 만든다. 즉 여자처럼 사건에만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에 관해서 알리바이를 둘러싼 천재들의 대결에만 정신을 집중하게 만든다. 조커를 내려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조커가 무엇인지 관심 갖지 말고 그것에 더욱 정신을 쏟으라는 의도된 친절인 셈이다.

그래서 <용의자 X의 헌신>을 보면 누구나 여자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여자처럼 사건을 바라보고 조마 조마한다. 그러다가 아주 순간적으로, 반전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진실을 알게 된다. 조커를 내려놓은 상대방이 사실은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무슨 뜻일까? 판은 두 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 '사건'이라는 판도 있지만, 뒤에서는 여자를 향한 남자의 미스터리한 행동에 관한 판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반전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것이지만, 어느 반전도 쉽게 만들 수 없는 놀라운 것임에 틀림없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긴장감을 주는 것이 덜하다. 천재들의 말과 설명이 비중이 큰 까닭이다. '수학'과 '물리'라는 직업적 수식어의 차이와 달리 천재들이 '비슷'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도 한 이유가 된다. 반면에 작품의 치밀함만 놓고 본다면 어느 작품보다 훌륭하다. 게다가 작품의 이면에 가려진 사람의 '헌신'이 가슴을 파고든다. '감동'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그것이 풍부하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숨고를 틈 없는 용장들의 일기토라면, <용의자 X의 헌신>은 빈틈없는 책사들의 설전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때문에 헛다리짚을지언정 독자로 하여금 나름대로 추측하게 해보는 기회가 원천봉쇄 됐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또한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기대치를 충분히 만족시켜주는 것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알라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했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재인(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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