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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면서 '연습'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 곧 인생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의 작가 조정래는 인생을 '인간연습'이라 말한다. "그 끝없는 되풀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한 '연습'이 아니었을까 싶다"(작가의 말 중에서) 연습이란 그 다음에 올 본행위를 전제한 개념이다. '한 번 살다가는 것이 인생'인데, 연습이라니… 인간은 혹은 인생은 숙명적으로 미완성이자 오류투성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 <인간연습>의 표지
ⓒ 실천문학사
어차피 연습인 인생이니 다 똑같은 것이고 어떻게 산들 모두 마찬가지인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회유하는 방원으로부터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기에 포은의 삶이 유의미한 것처럼 <인간연습>의 주인공은 자신이 디디고 선 시대를 온몸으로 껴안고 담아냈기에 그 연습은 연습이상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들의 연습은 이제 당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연습이 아닌 제대로의 인간, 본래의 인간적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강요한다.

"그 사람의 일생에 그 시대가 얼마나 담겨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책 127쪽)

조정래의 <인간연습>은 간첩으로 남파되어 30여 년간의 옥살이를 한 한 사상범의 육성고백이다. <태맥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이어지는 대하 3부작이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진 격랑을 헤쳐 나왔다면, <인간연습>은 그 분단역사의 바다 위에서 표류한 한 개인의 그늘진 삶을 추적한다. 이념의 광기가 인간을 부정하던 미친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한 '혁명의 순결'(책 38쪽)은 무엇일까?

이념의 골짜기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하는 회한이었다."(책 62쪽)
"시대는 변해가고, 그 파도는 거칠고 매정했다. 그 거센 시대의 파도 속에서 개개인은 하나씩의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다."(책 10쪽)
"아닙니다. 그건 환상이 아니라 망상이었습니다."(책 35쪽)


책 속의 주인공 윤혁이 마주한 이 물음들은 해방과 분단,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충돌과 대립으로 점철된 우리 시대를 향한 물음이기도 하다. 작통권 환수를 두고 마치 전쟁이라도 날듯이 과민 반응을 보이는 제복의 사내들을 보면 이 물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작가는 종교든 이념이든 그 안에 '인간'이 없으면 이는 모두 허구이자 가짜라 일갈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려고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그 반대로 비인간적으로 운용해왔으니 그런 체제가 망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책 100쪽)

"특히 이데올로기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인간의 문제였다…. 그런데 그들의 대다수가 이기심에 사로잡혀 신의 이름을 팔아가며 타락하고, 사회 권력을 형성해 횡포를 자행하고, 심지어 신을 내세워 살인을 합리화하는 전쟁을 불사해온 것이 인류사였다…. 인간의 이성이란 본능을 이길 수 없고, 그것이 인간의 한계 아닐까. 그 '인간의 한계'가 사회주의 몰락의 절대 원인은 아닐까…." (책 120쪽)


일제 치하와 분단을 거치면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이념에 경사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책 속의 주인공 윤혁은 그 시대의 바람을 비껴갈 수 없었을 뿐이다. 작가의 말처럼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에 게으르지 않은 누구나 이념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그때는 그렇게 치열하고 열정 뜨거운 시대"였고, 그리하여 그는 당원이 되었다.

"초기에는 초기의 순수와 열정이 발휘되는 법 아니던가. 그 시절에 당원이란 인민을 위해 솔선수범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절대가치로 삼고 있었고, 그런 자질과 정신무장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아예 당원이 될 수 없었지"(책 101쪽)

"6.25때 저는 대학 병원의 간호부였습니다…. 그런데 인민군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장교가… 자기는 나중에 할 테니 사병들부터 먼저 치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국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국군사병을 치료하다가 장교가 나타나면 당연히 장교부터 치료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까요….사회주의가 무엇인지 궁금하고...그 일로 제 생각은 완전히 그쪽으로 쏠리고 말았습니다."(책 180쪽)


윤혁이나 보육원장인 최선숙에게 바로 이런 것이 이념이었고 '혁명의 순결'이었다. 그들은 그 혁명의 순결을 믿었고 잃지 않으려 무한량으로 쌓여있는 '시간과의 싸움'(책 165쪽), 그 기나긴 옥살이를 견디어 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장담하고 많은 민초들이 신봉한 그 이념의 변질과 타락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윤혁의 '인간연습'이 유의미한 것은 바로 그 인간 정신의 본연을 잃지 않은 심성의 순수가 아니고 무엇일까. 시대가 몰락했다하여 개인의 삶까지 몰락했다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대지로

▲ 이중섭 작 <봉황> 남북 분단을 상징하고 있다.
ⓒ 아이세움
"인간은 이성적이기 이전에 본능적 존재야. 그래, 본능적 존재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이성의 힘이 큰 존재로 보려고 한 것이 착각이고…, 큰 오해를 저지른 것이라 할 수 있겠지…."(책 104쪽)

"마르크스주의란 기본적으로 밥 먹는 철학인데도 그것을 실현시키지 못해 결국은 스스로 몰락하고 말았다."(책 113쪽)

"제 생각으로는 사회주의는 아까운 세월을 허송만 했는데, 딱 한 가지 공을 세운 게 있습니다. 그건, 자본주의를 강화시켜준 역할입니다."


윤혁과 강민규의 대화, 사상적 쌍생아 관계에 있는 박동건의 막내아들과의 대화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의 붕괴, 즉 사회주의 사상의 몰락은 인간의 이기심을 도외시한 오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데올로기의 오류 혹은 이념에 경사된 광기가 저지른 역사의 오류들이 비단 그 자체만의 오류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책의 전편에 걸쳐 비판되고 있는 사회주의 몰락의 원인이나 이념의 편향이 불러온 불행한 역사의 오류들과는 별개로 우리가 저지른 오류들은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때로는 세상의 독버섯처럼 음습한 곳에서, 때로는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휩쓸며 광풍으로 몰아친다. 그것은 분단 상황에서 비롯되는 무참한 바람이다. 분단은 늘 우리를 '인간'보다 이념에 경사되도록 위협한다. 우리에게 '안보'는 강도가 든 칼이다.

그 칼을 어머니가 들고 있는 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을 찾아야 한다고 작가는 윤혁이 찾은 '인간의 꽃밭'에 빗대어 귀띔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든 이념이든 관념이 현실성을 획득하면 충돌을 면치"못함을 이제 우리는 깨우치고 심성의 순수와 자유로 우리의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고 조정래는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오류가 '인간의 한계'에 기인한 것일지라도, 그 이데올로기의 오류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인간의 본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작가의 조용한 외침은 생생하다.

이제 북이나 남이나 이념의 골짜기에서 나와 인간의 대지에 서야 한다. 골짜기와 대지를 가르고 불화를 부추기는 모든 활자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배격되어야 한다. 대문짝만하게 실린 제복 출신들의 국기에 대한 경례에 도무지 씁쓰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으니, 골짜기에 대지에… 나는 어디에 서야 하나.

한국전쟁의 징후를 미국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문학평론가 황광수가 쓴 <인간연습>의 해설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다름아니라 미국은 한국전쟁의 징후를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전쟁의 발발을 그들의 국가 이익을 위해 치밀한 각본 하에서 이용하였다는 사실이다.

해제된 미 국방성의 비밀문서 중 브루스 커밍스가 찾아낸 SL-17이란 문서가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왜 미국 국방부가 1950년 6월 19일부터 시작되는 1주일 동안 SL-17로 알려진 전쟁계획을 승인하고 퍼뜨렸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 계획은 조선인민군의 침공, 부산 방어선으로의 즉각적인 후퇴와 부산 방어선의 방어, 그런 다음에는 인천에서의 육해공군 합동 상륙작전을 가정했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작과 비평사/2001)

"이 문서는 미국이 이미 북의 침공을 조종하면서 부산방어선으로의 후퇴와 인천상륙작전까지 계획했음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고, 전쟁의 과정과 결과는 이 계획이 별다른 오차 없이 그대로 진행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황광수/해설 206쪽)

우리가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야만 하는 사실은 더욱 자명해진다. 언제까지 강대국의 총알받이 꼭두각시로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데 주권국가로써 작전권을 환수하겠다는 데,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는 모든 지도자와 세력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하여야 한다.

안보는 국민의 화합과 자유에 대한 신성불가침한 믿음에서 지켜지는 것이지 미군의 화력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베트남은 민족통일을 이룩해 강대국들의 억압에서 벗어났는데, 우리는 그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여전히 분단되어 강대국들의 힘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책 165쪽) / 임흥재

덧붙이는 글 | 인간연습/조정래/실천문학사/9,500원


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실천문학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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