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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죽은 고추가 썩어갑니다. 제 아픈 마음도 함께...
말라죽은 고추가 썩어갑니다. 제 아픈 마음도 함께... ⓒ 정상혁
초봄에 심어서 장마 전까지 수확의 즐거움을 한껏 누리게 해준 상추와 쑥갓은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처음 고추모종을 사다 심고 몇 주 동안은 고추와 피망이 커가는 모습에 '올 가을 김장에 전부는 아니어도 내가 농사지은 고추가루를 보탤 수 있겠구나'하고 뿌듯해 하기도 했지요.

맨 왼쪽은 피망입니다. 너무나 작은 꽃에서 열려 저렇게 컸답니다. 죽기전 고추들입니다.
맨 왼쪽은 피망입니다. 너무나 작은 꽃에서 열려 저렇게 컸답니다. 죽기전 고추들입니다. ⓒ 정상혁
경험이 일천한 얼치기 농부가 쨍쨍한 여름 햇빛에 잘 자라리라 믿고 또 믿었던 고추가 어느 순간 이렇게 모두 말라죽을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주말농장 관리하시는 분을 비롯해서 몇몇 농사일을 잘 아시는 분들께 여쭤보니 토양에 있는 어떤 균이 오랜 장맛비로 텃밭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모두 죽게 만든다고 합니다.

어설프지만 장대비를 맞아가며 쓰러진 것을 세운 적도 있었지요. 죽은 채로도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를 보니 속이 탔습니다.
어설프지만 장대비를 맞아가며 쓰러진 것을 세운 적도 있었지요. 죽은 채로도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를 보니 속이 탔습니다. ⓒ 정상혁
그 분들을 이야기가 일리 있는 것이 저희 고추뿐만 아니라 제가 다니는 주말농장의 모든 고추들이 한결같이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전문적으로 고추농사를 짓는 분들도 고추농사는 이런 병충해 때문에 어렵다고 입을 모읍니다.

겨우 고추대 20개를 심은 제 슬픈 마음과 허무함이 이 정도인데 시골에서 허리도 못 펴고 고추대 세우고 줄로 묶어가며 애써 기른 고추들을 모두 잃은 분들의 심정은 어떨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죽은 고추만 바라보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올 가을 김장을 위해서 김치와 무를 심기로 했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옆에 세워둔 채로 죽은 고추대를 모두 뽑고 잡초 우거진 빈 땅도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땅을 다시 갈아엎고 퇴비 두 포대를 뿌려 다시 잘 섞어주고 검은 비닐까지 쳤습니다.

혼자서 꼬박 2시간을 일하고 구멍을 뚫어 배추는 두 뼘 간격, 무는 한 뼘 간격으로 심었습니다. 코딱지만한 다섯 평 텃밭이 어찌나 광활한지, 이날 하루 일하곤 며칠간 허리가 뻐근해서 혼났습니다.

왼쪽은 저희 텃밭, 중간은 바로 옆 텃밭, 오른쪽 텃밭은 가지런히 예쁘게 정리됐네요.
왼쪽은 저희 텃밭, 중간은 바로 옆 텃밭, 오른쪽 텃밭은 가지런히 예쁘게 정리됐네요. ⓒ 정상혁
내공은 이런 곳에서부터 차이가 나나 봅니다. 한 눈에 봐도 맨 오른쪽 텃밭은 가지런한 것이 예쁘게 정리가 되었는데 제 텃밭은 비뚤비뚤한 것이 '나 초보요!'하고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일주일 후, 더운 날씨에 물 한 번 제대로 못줬는데 싹이나 제대로 틔웠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몇 구멍 발아가 늦은 것을 빼놓고는 상태가 좋아 보입니다.

빼꼼히 싹을 내민 배추씨앗들입니다. 떡잎이 크고 시원시원하게 잘 생겼습니다. 이제 이 녀석들이 제 새 희망입니다.
빼꼼히 싹을 내민 배추씨앗들입니다. 떡잎이 크고 시원시원하게 잘 생겼습니다. 이제 이 녀석들이 제 새 희망입니다. ⓒ 정상혁
뉴스에서는 야채 값이 엄청 비싸다고 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신경 써서 몇 포기 더 심을 걸 하는 후회도 들고요. 고추가 남긴 제 마음 속의 상처를 저 배추며 무 씨앗들이 자라서 달래줄 수 있을까요? 석 달 후를 기대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비뚜름하게 쳐진 텃밭 비닐을 보신 주말농장 관리인 아저씨께서 "비닐 잘 친다고 농사 잘 되는 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하고 위로해 주십니다.
저도 그 말을 꼭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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