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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형진의 <백석 시 바로 읽기>(현대문학)
ⓒ 현대문학
언젠가 한 문학잡지에서 재미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설문의 내용은 한국의 유명 시인 156명에게 '자신의 시 창작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거나, 타인에게 단 한 권의 시집을 추천하라면 어떤 시집을 들겠는가'라는 것이었다.

그 설문에서 1위가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이었다. 1936년 백석의 나이 25세에 33편의 시를 묶어 200부 한정판으로 펴낸 <사슴>이 우리 현역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이라는 설문 조사 결과가 나왔다.

시집 <사슴>은 1930년대 당시 한국적인 삶의 원형을 가장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백석의 초기 시에는 풍속지를 연상시킬 만큼 한국인의 삶, 특히 유년기에 체험했던 전통적인 식생활과 놀이가 독특한 기법으로 다양하게 녹아들어 있다.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 지방의 언어로.

백석 시에서 평북 정주 지방의 방언을 뺀다면 조사와 몇 개의 단어가 남을지 의심될 만큼 그의 시는 방언 지향성이 매우 강렬하다.

독자들이 백석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방언으로 된 시어 해독의 문제가 관건이었다. 필자도 1987년 영남대학교 이동순 교수가 펴낸 <백석시전집(白石詩全集)>으로 백석 시를 처음 접할 때 난생처음 보는 평북 정주의 사투리 때문에 시의 내용이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부록으로 나온 시어 풀이를 거듭해서 읽다 보면, 시 내용의 문맥을 놓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면 시의 구조적 특질이나 표현의 미를 이해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었다.

백석의 표현의 미학 만져보세요

▲ 시인 백석
ⓒ 이종암
일반 독자들에게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 백석 시를 쉽게 이해하고, 표현의 미학을 만져볼 수 있도록 한 백석 대표시 해설서가 나왔다.

고형진의 <백석 시 바로 읽기>(현대문학, 2006)가 바로 그것이다. 백석 시 읽기의 빛나는 길잡이라 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인 고형진은 1983년 <백석 시 연구>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쓴 이래로 줄곧 백석의 시 세계를 연구해온 백석 전문가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그의 적확하고 성실한 백석 시 안내를 받으면 누구나 백석의 시의 참다운 맛을 느낄 수 있다.

빛나는 백석의 시와 고형진 교수의 해설, 그 진면목을 먼저 봐야 하겠다. 아래 시는 백석의 시 가운데 가장 짧은 시 '비'라는 작품이다.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 두레방석-짚이나 부들 따위로 둥글게 엮은 방석.
* 물쿤-물큰. 냄새 따위가 한꺼번에 확 풍기는 모양.

이 시는 단 두 줄의 간명한 소품이지만, 백석의 이미지 표현이 지닌 특징이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시를 통해 백석은 사물에 대한 인상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경우에도 다른 시인들과는 차별되는 독창적인 표현방법을 모색했음을 단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비'에 대한 감각적 묘사에 치중하고 있는 이 작품의 첫 행은 시각적인 묘사이다. 비가 내려 아카시아 꽃잎이 땅 위에 떨어져 있는 풍경을 '흰 두레방석'에 비유한다. 하얀 아카시아 꽃잎이 땅 위에 겹겹이 쌓이고 일정한 모양을 형성하고 있는 풍경에서 시인은 짚으로 촘촘히 엮어진 흰 두레방석을 연상한다.

두레방석은 우리의 전통생활에서 흔히 보는 일상의 사물이다. 넓은 두레방석 위에 곡식 같은 것을 말리기도 하고, 또 나무 그늘에 깔아놓고 그 위에 편안하게 쉬기도 한다.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 무수히 내려앉아 있는 아카시아 꽃잎의 군집을 나무 아래에 깔아놓은 흰 두레방석으로 그려놓은 이 선명한 이미지에는 우리의 전통생활의 정서가 물씬 묻어 있다.

그의 시각적 이미지는 이처럼 우리의 토속 사물에 빗대어서 묘사된 것들이 많다. "뚜물같이 흐린 날"(시 '쓸쓸한 길'), "구덕살이같이 욱실욱실하는 손자 증손자"(시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살빛이 매감탕 같은"(시 '여우난골족') 등의 이미지 표현들이 모두 그러하다.

곡식을 씻어낸 물인 '뚜물(뜨물)'은 흐린 날씨의 탁한 시야와 우중충한 표정을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구더기를 지칭하는 '구덕살이'는 누런 얼굴에 때가 잔뜩 낀 시골의 조무래기 아이들이 득실거리는 느낌을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고, 엿 같은 것을 고아낸 물을 지칭하는 '매감탕'은 누렇고 윤기 없는 시골사람들의 피부색을 적절하게 그려낸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물에 대한 인상을 선명하게 그려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흰 두레방석'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토속적인 정취까지도 자아낸다. 그것은 뜨물이나 구더기나 매감탕 등 사물들이 모두 전통적인 생활 속에 뿌리 박혀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통생활 속에서도 먹고 배설하는 등의 기본적인 욕망 충족에 관계된 것들이어서, 생활 속의 정취가 절실하게 풍겨난다. 이미지 표현이 감각의 싱싱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체취와 기운까지도 자아내고 있는 것이, 바로 백석 시가 지닌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다.

두 번째 행에서 묘사된 이미지 표현도 이러한 맥락 위에 놓여 있다. 두 번째 행은 후각적인 묘사이다. 비 내리는 날의 느낌을 '개비린내'라는 후각 이미지로 묘사한다. 비 맞은 개에선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풍긴다. 개들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시골의 황톳길에서 비 오는 날이면 비릿한 개비린내들이 풍겨난다. 그 냄새는 비 오는 날의 황토 냄새와 섞여 더욱 짙어진다. 그리고 비 오는 날씨의 고여 있는 대기 탓에 유난히 우리의 코를 자극하게 된다.

'어데서 물쿤'이라는 부사들은 비 오는 날 콧속으로 엄습하는 시골마을의 개비린내 나는 체취를 여실히 느끼게 한다. 비에 대해 묘사를 하면서도 선명한 감각의 재생에 치중하기보다는 비 내리는 마을의 대기의 정취를 드러낸다는 것이 바로 백석 시의 남다른 점이다.

그의 시의 이미지 표현은 회화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정서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시각 이미지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이미지들이 동시에 구사된다. 이 시에서도 시각적 이미지와 후각적 이미지가 함께 구사되고 있다.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 정도에 갇혀 있던 종래의 이미지 표현의 테두리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 백석 시가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이다. 그 가운데서도 후각적인 이미지와 미각적인 이미지의 구사는 시사적으로 선구적인 것이다. 미당의 '화사'의 첫 구절에 나온 강려한 후각 이미지인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라는 시행 앞에는 시사적으로 백석 시의 후각적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다. 백석은 이미지 표현에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한편 이 시는 이시영의 시 '풍경' 속에 드리워져 있다. 백석의 '비'는 이시영의 '풍경'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된다. 백석 시에서 토속적 정취를 자아내는 역할을 했던 '흰 두레방석'과 '개비린내'는 이시영의 시에서 '샛노란 꽃방석'과 '아가씨 품에 안긴 개'로 변형되면서 도회지의 봄 풍경으로 거듭나고 있다.

아카시아들이 다투어 포도 위에 샛노란 꽃방석을 깔았다.
아가씨들보다 아가씨들의 품에 안긴 개들이 먼저 사뿐히 뛰어내린다.

이런 날 아스팔트도 단 한번 인간의 얼굴을 한다.

-이시영의 '풍경' 전문


백석 시를 읽어내는 고형진 교수의 해설을 제대로 음미하고자 시 '비'에 대한 해설 전문을 인용했다. 이는 <백석 시 바로 읽기>에서 가장 짧은 부분인데, 함경북도 정주 지방의 방언으로 토속적인 음식과 놀이 문화를 집중적으로 그려내는 백석의 다른 시에서 고형진 교수의 해설은 더욱 빛을 발한다.

시 '여우난골족', '연자간', '외가집', '모닥불', '함주시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등의 작품 등에서 보여준 시 해설은 탁월한 것이다.

고형진의 <백석 시 바로 읽기>는 분단 이전에 발표한 백석의 시 97편 가운데 그의 개성과 작품성이 뛰어난 60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는 선별된 백석의 대표시 60편의 각 개별 작품마다 시어 풀이는 물론, 맞춤법을 어긋나게 표현한 시구들과 백석이 일부러 만들어 사용한 조어들의 의미와 그 가치도 놓치지 않고 밝혀놓고 있다.

또 백석의 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서술방식의 특징, 이를테면 판소리 사설의 진술 방식인 '엮음' 의 표현 형태와 짝을 이뤄나가는 반복법과 열거법의 구사, 제목의 명명(命名) 등에서 보여지는 낯설게 하기 방식, 종결형의 '-것이다' 등의 독특한 구문 방식 등을 정치(精緻)하게 분석하고 설명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이러한 백석 시 창작의 비법은 오늘날 현역 시인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올해 상반기에 나온 시집 가운데 가히 백미(白眉)로 보이는 문태준의 <가재미>(문학과지성사)와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 등의 시집에는 백석 시의 빛깔이 살아 꿈틀대고 있다.

백석 시의 진수를 맘껏 맛보게 해준 고형진 교수께 전화라도 한 통 넣고 싶다. 한국시를 사랑하는 수많은 독자와 시인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백석 시가 갖고 있는 그 놀라운 감동을 맛보았으면 한다.

백석 시 바로읽기 - 백석 대표시 해설

백석 원작, 고형진 지음, 현대문학(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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