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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전 운중보에 도착한 시각은 언제였소?"

풍철한이 묻자 쇄금도 윤석진이 귀찮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쓸데없는 것까지 묻는 이유는 무엇이오? 그 질문은 벌써 수십 번도 더 받았소."

약간은 거만스러운 기색을 띠면서 대답하는 윤석진을 향해 풍철한은 무의식적인지 모르지만 용봉쌍비 중 용비를 왼손에 든 채 오른손으로 검자루를 쥐고 살짝 뺐다가 다시 집어넣는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장난 같았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질문을 받는 윤석진이 허튼소리를 계속하면 용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위협으로도 보였다.

약간 능글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는 풍철한이 더 이상 묻지 않고 빤히 쳐다보며 손장난을 계속하자 윤석진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나흘 전 오후에 도착했소."

오후라면 신시(申時) 초일 것이다. 운중보로 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운중선은 언제나 오전에 사시(巳時) 말에서 오시(午時) 초에, 그리고 오후에는 미시(未時) 말에서 신시(申時) 초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 시각은 지금까지 변경된 적이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매송헌으로 갔소?"

"그렇소."

대답은 하고 있지만 뭔가 시원스럽지 않은 기색이었다. 능구렁이 풍철한은 그런 기색을 놓칠 위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매송헌 철담어른의 방에 들어간 시간은 신시 초 정도 되었겠구려."

윤석진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풍철한의 질문은 평범한 것이었지만 윤석진에게는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그건… 그렇지 않소. 내가 사부님 방에 들어간 시각은 아마 신시 말쯤이었을 것이오."

"실망스런 일이군. 신시 초라면 아마 성곤어른께서 귀하의 사부님을 만나시고 나올 시각이었는데 그럼 당신은 성곤어르신을 만나지 못했단 말이오?"

사건을 조사하는데 있어 사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망시각이다. 사망한 시각을 정확히 추정을 할 수 있어야 흉수의 범위를 좁히게 되기 때문이다. 좌등의 말에 의하면 점심 후에 운중보주가 왔었고, 회운사태와 성곤이 뒤를 이었다. 설명한 시각으로 보아 성곤어른은 신시 초쯤 매송헌을 나왔을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소. 곧 바로 찾아뵈려 했지만 가려(佳麗)가 전하길 사부께서 성곤어르신을 만나고 계신다하여 잠시 내 거처에 머루고 있었소."

"가려라니 누구를 말함이오?"

"운중보와 매송헌의 시비를 관리하는 여자요."

"당신의 거처는 어디요?"

"매송헌 뒤쪽에 있는 소각 두 개 중 왼쪽에 있는 것이오."

"성곤어른은 신시 초에 운중보주께 가셨다고 보이는데 왜 신시 말이나 되어서 철담어른을 뵈러 갔단 말이오?"

몇 년 만에 돌아와 사부를 뵈러 온 사람이라면 손님이 나가는 것을 기다려 곧바로 사부를 뵈는 것이 보통이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한 시진 약간 못 미치는 시간 동안 윤석진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게… 돌아오느라 급하게 서둘렀더니 피곤했던 모양이오. 더구나 오랜 만에 배를 탔더니 약간 멀미가 느껴져 좀 쉬고 있었소."

말은 그럴 듯 했지만 어디까지나 변명으로 들린다. 윤석진 같은 고수가, 더구나 돈 많은 아내 덕에 뛰어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말이나 마차를 이용했을 터인데 피곤을 느낄 수 있었을까? 더구나 자신도 타 보았지만 운중선의 움직임은 배 멀미를 할 정도는 분명 아니었다. 동정호와 같이 넓은 호수라면 파도라도 일었겠지만 서호 같은 곳이야 파도가 쳐 보았자 그런 정도. 더구나 운중선의 규모는 일개 범선이 아니어서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성곤어른께서 매송헌에서 나가셨다고 전갈을 들었는데도 쉬고 있었단 말이오?"

"전갈을 받지 못했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황은 분명해졌다. 성곤이 철담의 거처를 나간 시각이 신시 초, 그 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가운데 신시 말이 되어 윤석진이 철담을 찾은 결과 죽어 있었으니 사망시각은 신시다.

"철담어른의 방으로 들어가서 본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소?"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던 함곡이 물었다. 그러자 윤석진은 조금 전과는 달리 거리낌 없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방문 앞에서 몇 번 사부님을 불렀소. 헌데 대답이 없으시기에 어디 나가셨나보다고 생각했소. 내 거처로 돌아갔다가 이상해 다시 와서 방문을 열어 보았던 것이오. 그랬더니 마치 주무시듯 서탁에 앉아 계시는데 전혀 움직임이 없어 돌아가신 것을 알았소."

몇 번 대답을 했던 사항 같았다. 더구나 말을 하는 그의 눈빛이 어느새 잠잠히 가라앉아 있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귀밑과 팔목을 잡아보고는 확실히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래서 곧바로 좌총관께 말씀드렸던 것이오."

"사인은 보셨소?"

"물론이오."

그때 풍철한이 불쑥 끼어들었다.

"당신이 보기에 흉수는 누구일 것 같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윤석진은 잠시 곤혹스런 기색을 띠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자신에게 이리 묻는 것일까?

"처음에는 보주라 확신했소. 보주가 아니라면 그토록 깨끗하고 정교하게 심인검의 상처를 내지 못할 것이란 판단에서였소. 그것은 심인검이 최소 십성에 달해야 남길 수 있는 흔적이었소."

"그런데…?"

"분명한 것은 없소. 또한 심인검이 보주만 펼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게 무슨 소리요? 심인검은 보주의 독문무공이 아니오?"

"아무것도 아니오…. 못들은 걸로 치시오. 내가 대답할 사항이 아니니 나중에 알아보도록 하시오. 나 역시 나름대로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누가 흉수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오."

황급히 입을 다무는 윤석진을 보며 풍철한과 함곡은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무언가 있었다.

"당신 역시 조사하고 있다니 말인데… 그래 그 동안 알아낸 것이 좀 있소?"

풍철한의 질문은 아주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다. 윤석진은 잠시 풍철한을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다소 이상한 징후 몇 가지가 있소. 하지만 아직 말씀드릴 단계는 아닌 것 같소. 어차피 우리는 계속 만나게 될 터이니 어느 정도 확신이 들면 말씀드리겠소."

"확신하지 못해도 그 이상한 징후라는 것이 무언지 대충 말해줄 수 없겠소? 사실 오늘 처음 이곳에 들어와 갑작스럽게 이런 사건을 맡다보니 모든 것이 다 의혹스런 일들뿐이오."

풍철한이 울상을 하면서 사정하듯 말했다. 윤석진은 풍철한의 사정하는 말에 깜빡 넘어갈 뻔 했다. 그의 말투가 너무 진지하고 불쌍해보였기 때문이었다. 윤석진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헛기침을 했다.

"험험… 역시 풍대협은 소문대로 무서운 심계를 가지고 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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