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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빈 의자와 같은 것 (사진 /이성재)-저작권 문제없음
인생은 빈 의자와 같은 것 (사진 /이성재)-저작권 문제없음 ⓒ 나관호

<오마이뉴스>에 글을 보내 놓고 나면 고민이 생긴다. “혹시 오자는 없나?” 이유는 그 유명한 ‘독수리 타법’이 내 특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때문’을 ‘대뭄’으로, ‘오마이’를 ‘오마니’로, ‘행복’을 ‘행족’으로, ‘생각’을 ‘생가’로 친다.

때론 한 줄을 치고 나면 받침과 영어가 엉켜서 몇 번 수정한다. 그런데 그 순간이 좋은 것은 글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더 읽고 문맥을 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어떤 상황이든 긍정으로 보는 것도 내 특기 중 하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태도는 아니다.

언젠가 어느 잡지에 청탁을 받아 글을 보냈는데 ‘선교’라는 말을 ‘성교’로 보내 얼굴이 화끈거린 적이 있다. 잡지사에서 교정 없이 내보내 곤혹을 치렀다. 그 후 오자가 안나오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다. 수정하고 다시 읽어보면 오자가 없어서 보냈는데 글이 올라오고 나면 오자 투성이다. 속으로 “편집기자가 오자를 만들었나?”라고 말하고 혼자 웃는다. 어느 잡지의 원고에는 7군데가 틀렸다. 편집자들도 어떤 경우는 필자의 특수 용어처럼 여기는지 좀처럼 틀린 오지를 고치지 않는다. 그래도 온라인은 고칠 기회가 있어 다행이다.

그런데 온라인일 경우 내용상 큰 문제가 없으면 수정 요청을 안 한다. 이상하게 볼지 모르겠다. 이유는 새내기 시민기자로서의 애교(?), 두 번째 바쁜 편집기자들의 수고를 두 번 받고 싶지 않은 배려(?), 세 번째는 자칭 나만의 매력(?)이다. 2% 부족한 표현에, 2% 부족한 맞춤법이 어울릴 것 같아서다. 여러 마음이 뒤섞여 있지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꽉 차지 않은 물잔, 높이가 다른 눈썹, 여성들 구두 밑창의 떼어내지 않은 상표, 자동차 옆문의 파인 작은 상처, 약간 흐트러진 신발정리, 구두를 닦았는데 누군가 끝 부분을 살짝 밟은 자국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것은 편안함을 준다. 너무 완벽하면 숨막힌다. 그렇지만 글에 오자가 없는 것이 좋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더 솔직한 표현은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마치 수학을 못하는 아이에게 수학을 강조하고, 정리를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책상을 깨끗이 쓰라고 하는 것, 먹기 싫은 시금치를 먹으라고 하는 것, 팔자걸음을 보고 정자 걸음을 걸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나의 오자를 독자들이 애교로 받아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노력은 하고 있다. 심지어 이 원고를 쓰면서 까지 오자에 신경이 쓰인다.

편집자들도 혹 필자들이 그런 표현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주는 부분도 있어 고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너무 친절한 편집자가 필자의 글을 왜곡할 수도 있다. 어느 잡지사에 내가 보낸 글 중 ‘동거동락’의 표현되어야 할 부분을 ‘동고동락’으로 바꿔 놓아 내가 묘한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이유는 ‘동고동락’을 더 많이 쓰고 익숙해져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무심코 읽어 내려가서 그랬을 것이다.

이랬든 저랬든 아무튼 나는 ‘오자 사나이’다. 왜 오자가 안 보이는 것이지 잘 모르겠다. 정말 안 보인다. 완벽해 보인 것이 분명한데. 아마 글이 전송되는 과정에서 오류가 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신중하지 않은 성격도 아니다. 어떤 경우는 신중하다. 물론 O형 피를 담고 있어 덤벙대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정말 오자가 안나오게 하려고 무척 신경 쓴다. 그런데 오자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도 나는 긍정으로 해석하고 싶다. 나의 ‘생각과 말’을 부정에 맡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애교’니 ‘배려’니 하면서 호소하는 것이다. 마치 초등학교 웅변대회에서 외쳤던 그런 표현 말이다.

“이 연사(올리고), 오자(또박또박) 없는(올리고) 세상을(강조) 만들도록(올리고) 노력(엑센트)하겠습니다.~~~”

나는 오자에서 인생을 본다. 완벽할 것 같은 사람이 오자(실수)를 보이면 그것은 큰 웃음이다. 100분 토론 진행자 손석희씨는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가진 인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큰 웃음보다는 작은 미소를 가진다. 때론 논리적인 진행으로 패널들을 정리한다.

그런 그가 “시청자 여러분!” “시떵자 여러분!”이라고 했다고 가정해보자. 웃음이 나올 것이다. 그런 그를 보고 심한 댓글을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손석희씨 때문에 웃었어요.”이런 정도일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오자가 나타날 때 유머와 애교로 봐주자. 완벽한 인생은 없다. 모든 인간은 2% 부족하다. 내가 늘 강조하는 말인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고 입장은 바뀐다”는 가치관이 오자 인생의 핵심이다.

어느 기사에 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은 방귀를 뀌지 않을 것 같다거나, 화장실에도 다니지 않을 것 같다는 팬들의 이야기를 보았다. 생리현상까지도 없을 것 같이 연예인을 바라보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인생이란 크게 차이나는 것이 아니다. 한 발짝 차이일 뿐이다. 지위나 명예나 재산이나, 많고 적음은 어떤 면에서 종이 한 장 차이로 봐야 한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한 것 아닌가.

우리 모두가 서로 존중받고 가치관을 인정해야만 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것 때문이다. 인생은 오자가 있기 마련이다. 오자가 크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오자가 없다고 해서 뛰어난 가치를 갖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지금까지 오자 없었나요?)

덧붙이는 글 | 나관호 기자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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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발행인, 칼럼니스트다. 치매어머니 모신 경험으로 치매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다.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로 '생각과 말의 힘'에 대해 가르치는 '자기계발 동기부여' 강사,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이며 심리치료 상담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는 교수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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