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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달구지를 타며 즐거워하는 어린이들(경기도 양주시 하천관리사무소 앞).
소달구지를 타며 즐거워하는 어린이들(경기도 양주시 하천관리사무소 앞). ⓒ 정길현
지난 휴일(17일) 서울 근교에서 열리는 코스모스 축제 현장에 가다가, 뜻밖에 도심 한복판에서 아이들을 태우고 유유자적 도로를 지나는 소달구지를 보았다.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소달구지를 도심에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선 차를 멈추고 사진부터 찍었다. 달구지에 타고 자주 장에 다녔던 어릴 적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난 유년 시절을 가족과 떨어져 시골 큰집에서 보냈다. 아이들이 없어 적적하다며, 할머니께서 나를 시골에 있던 큰집에서 초등학교에 다니게 하셨기 때문이다.

어릴 적, 휴일에 장날이 겹치면 항상 큰아버지를 따라 장에 다녀오는 것이 내겐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장터가 가까워지면 길 옆에 소(牛)전이 있었고 그 옆에선 개, 닭, 염소 등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각종 과자와 잡화, 건어물, 생선, 과일, 옷감 등 없는 것이 없었던 시골 장터의 추억이 새롭다.

명절 코앞에 서는 대목장이면 큰아버지께선 일하는 아저씨를 시켜 달구지에 쌀, 콩, 닭, 계란 등을 가득 싣고 나를 뒤에 태운 다음, 당신은 걸어서 장으로 가셨다. 오전 내내 이것저것 내다 팔고 오후가 되면 달구지엔 싣고 갈 물건들이 하나둘씩 쌓여갔다. 큰아버지께서 마지막엔 내 손을 잡고 옷 가게에 들러 추석빔으로 옷과 새 신을 사주시던 기억이 난다.

"이 녀석 또 오줌 쌌구나"

햇밤과 햇고구마, 햇땅콩 등 햇곡식이 풍성한 장터(양주시 덕정장터)
햇밤과 햇고구마, 햇땅콩 등 햇곡식이 풍성한 장터(양주시 덕정장터) ⓒ 정길현
어, 저건? 키와 얼개미(곡식을 빻아서 거르는 체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가 눈에 들어와 혼자 눈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저걸 사용할까' 의문이 들 무렵,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저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오던 아랫집에 살던 두 살 위 선배가 생각났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이불에 오줌을 싸 실컷 혼나던 그 선배는 풍습에 따라 벌로 머리에 키를 뒤집어쓰고 이웃집을 돌며 바가지에 소금을 얻으러 다녀야 했다. 어른들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녀석 또 오줌 쌌구나. 이번만 특별히 주는 거야. 이제 우리도 소금 없으니 다시는 가지러 오지 마라, 이 녀석아." 그러나, 소금 없다던 어른들은 그 선배가 찾아올 때마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매번 소금을 한 움큼 담아줬다.

예로부터 아이들이 이불에 오줌을 싸면, 키를 쓰고 소금을 받아오게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조상들은 아이가 오줌을 싸는 건 아이에게 오줌 싸는 귀신이 붙어 몸을 허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아이에게서 그 귀신이 물러나기를 바라며 "귀신아 물렀거라"하면서 아이가 쓰고 온 키에다 소금을 한 주먹씩 뿌리고 바가지에 귀신이 싫어하는 소금을 담아준 것도 그 때문이다.

농촌에서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던 키.
농촌에서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던 키. ⓒ 정길현
난 옛 추억을 되살리며 시골장이 서는 장터(경기도 양주시 덕정장터)로 발길을 돌렸다. 아직 본격적인 추석 대목장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마른 제수를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장날은 언제나 장꾼들의 분주한 손놀림과 손님들이 가격을 깎는 소리, 덤을 요구하는 흥정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리워라, "뻥이요!"와 '옥춘'의 추억

예전 장터나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뻥'기계.
예전 장터나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뻥'기계. ⓒ 정길현
사람들과 부딪히며 이곳저곳 구경하는데 어디선가 "뻥이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튀밥 만드는 소리였다. 어려서 시장에 갔을 때 가장 반가운 소리가 바로 이 소리였다. 어른들은 귀를 막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기계 앞에 몰려들어 하늘로 솟구치다 떨어진 튀밥을 주워 먹으며 좋아했다.

쌀이나 옥수수를 튀기면 맛있는 먹을거리가 생겼기 때문에 당연히 나도 장날을 좋아했다. 뻥튀기 아저씨는 '요술기계'에 쌀, 보리, 옥수수 등을 넣고 불을 지펴 돌리다가 속에 있는 게 보이지도 않는데 다 익은 것을 어떻게 아는지, 불을 빼고 '뻥' 튀길 준비에 들어갔다. 아저씨의 오른손엔 항상 쇠막대기가 하나 들려있었다. 어린 시절, 내 눈엔 그 쇠막대가 요술봉으로 보였다.

"뻥이요!" 귀를 막으면서도 참 좋았던 그 소리. 저 하얀 연기까지 그립다.
"뻥이요!" 귀를 막으면서도 참 좋았던 그 소리. 저 하얀 연기까지 그립다. ⓒ 정길현
큰집에서는 명절 때면 쌀, 떡살 말린 것, 콩, 조 등을 사용해 평소보다 다양하게 '뻥'을 튀겼다. 모두 제사상에 올릴 산과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뻥' 하고 기계에서 튀밥과 연기가 솟구쳐 나올 때 튀밥을 한 주먹씩 집어 달아났다. 우직했던 난 배고픈 줄도 모르고 '요술기계'에서 튀밥들이 쏟아져 우리 자루에 다 담길 때까지 아이들이 집어 달아나지 못하도록 지켰다. 그러느라 '요술기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릴 적에 즐겨 먹던 무지개 젤리(왼쪽), 무지개 과자(가운데), 무지개 사탕(오른쪽).
어릴 적에 즐겨 먹던 무지개 젤리(왼쪽), 무지개 과자(가운데), 무지개 사탕(오른쪽). ⓒ 정길현
중년층 중, 무지개 색소를 넣어 맛있게 보이는 '옥춘'이라는 무지개 사탕과 무지개 과자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명절 차례상이나 일반적인 잔칫상에 올라가던, 고운 색깔을 입힌 2색이나 5색의 무지개 과자들은 지금도 시골에선 잔치 때면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온다. 무지개 과자와 사탕을 친구들과 먹다 보면 혀에 빨간 물감이 묻어 상대방 혀를 보면서, 특히 여자아이들에게 '큰일났다, 너 도깨비 혀 됐다'고 놀리던 기억이 아련하다.

엄마 손을 잡고 추석빔을 장만하기 위해 장에 나선 아이들(덕정장터에 다녀온 지 사흘 후인 20일 찾은 동두천장터에서).
엄마 손을 잡고 추석빔을 장만하기 위해 장에 나선 아이들(덕정장터에 다녀온 지 사흘 후인 20일 찾은 동두천장터에서). ⓒ 정길현
이곳저곳 돌다 보니, 아이들이 어머니 손을 잡고 옷 점포를 기웃거리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옷 점포 쪽에 아이들이 많은 것을 보면, 명절을 앞두고 추석빔을 준비하기 위해 나온 것 같다. 대도시 아이들과 달리 '메이커' 옷을 고집하지 않고 엄마가 사주는 옷을 다소곳이 입어보며 좋아하는 저 아이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내겐 어머니와 다정히 손잡고 추석빔을 사본 기억이 없다. 어릴 적 큰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장에 새 옷 사러 간다고 할 때면 혼자 심통이 나서, 길가에 매여 있는 염소를 발로 차며 애꿎은 화풀이를 해댔던 기억만 있다. 엄마 손을 잡고 새 옷을 고르는 흐뭇한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올 추석엔 늙으신 어머님 손을 내가 잡고 장에 나가 추석빔으로 신발과 옷을 사드리는 건 어떨까.

'메이커'가 아닌 옷도 마다하지 않고 행복해 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
'메이커'가 아닌 옷도 마다하지 않고 행복해 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 ⓒ 정길현

#추석 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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