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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비에 젖은 털작은입술잔버섯 유균(어린버섯).
ⓒ 고평열
삶에 비가 내린 어느 날, 흠뻑 젖은 몸을 떨며 심하게 앓았다. 비를 가릴 그 무엇도 없이 내가 그냥 세상에 던져져 있음을 알았을 때의 그 긴장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삶의 터는 양지바르지 않았고 스산한 습기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 잠시 내리는 햇살에 뽀송뽀송해지는 털들.
ⓒ 고평열
사는 동안 비 내리는 날만 계속됐다면 삶은 그냥 끝났을 테지... 작은 햇살이 나무 사이로 스며들어와 삶의 온기를 불어 넣어 주지 않았더라면 죽어가며 그렇게 썩어갔을 테지.

▲ 털작은입술잔버섯.
ⓒ 고평열
다시 찾아온 인생의 봄에서 물오른 '털작은입술잔버섯'처럼 나는 삶의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삶의 향기가 무르익은 내 나이는 마흔다섯, 그리고 9월에 나를 찾은 반갑지 않았던 손님 '암'.

▲ 술잔의 내부가 열리면 포자는 성숙해집니다.
ⓒ 고평열
초기라고 했지만, 이제 갓 자리잡은 작은 세포덩어리라고 했지만 '암'이라는 한 글자에 담긴 의미는 전율과도 같은 긴장을 주었다.

▲ 털작은입술잔버섯.
ⓒ 고평열
왜 이렇게 아쉬움이 많을까. 할 일은 아직도 많고, 하고픈 일들도 그 끝이 다 드러나지 않았는데, 버섯은 아직도 오름과 곶자왈에서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나의 관심을 희망할지도 모르는데...

▲ 농익은 색깔은 차차 퇴색되고, 버섯은 잔을 벌려 내부를 드러냈다.
ⓒ 고평열
내 내부를 열어 상처를 도려냈다. 아이를 셋 키운 '宮'이 있던 자리는 터만 남았다. 이제 여자는 없고 그냥 사람이 됐다.

▲ 작고 앙증맞은 양주잔을 닮은 버섯.
ⓒ 고평열
1막 1장이 끝나고 다시 막이 오르는 새 장이 열렸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내부의 저 깊숙한 곳 어느 장기가 다시 반란을 일으킬지는 알 수 없으니...

▲ 비로소 마무리되어가는 버섯의 삶... 건배라도 하듯이.
ⓒ 고평열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셨던 그때 그 나이 마흔다섯과 암. 그리고 다시 마흔다섯이 된 나는 현대의학의 힘을 빌어 조기발견, 조기치료라는 행운을 얻었다. 마감해야 하는 생을 예감하셨던 어머니의 눈물이 28년 세월을 훌쩍 넘어 입원해 있던 기간 내내 다시 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병은 세습됐지만, 한숨은 세습되지 않았다.

▲ 제 삶을 순조롭게 다한 생명에 깃드는 경건함.
ⓒ 고평열
비는 다시 내릴 것이다. 빗물에 튕겨진 흙이 그를 옴팡 덮씌워도 털작은입술잔버섯의 내부에는 버섯의 포자가 무르익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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