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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베개
묵향이 번지는 기록

묵향이 번지는 가운데 술잔이 오가고 시를 주고받는다. 마주앉아 있다. 혹은 산을 넘어 그리며 벗이 보낸 시구만을 마주하고 있다. 시를 주고받는 우정은 어떤 관계일까.

<거문고 줄 꽂아놓고>는 조선시대 열두 쌍의 우정을 되짚는다. 저자가 따라간 신륵사에서 열하까지 과거의 문재(文材)들이 머물었던 자취가 눈에 그려질 듯 재현된다.

승려와 유학자가, 선비와 기생이, 노론과 소론이, 고려 말의 충신과 조선 건국의 공신이, 조선의 서얼과 청나라의 명사가 시를 주고받는다. 험난했던 조선사의 숨가쁜 여정 속에 묵직하게 소신을 실천했던 자들이 서로 존중하고 소통하고 있다.

위치한 자리가 달라서, 혹은 자주 만나지 않아서 이들의 우정은 일상을 부대끼는 사귐은 아니더라도 마음속의 씨앗 같은 진심을 나눈 흔적이기에 오래도록 그 향이 남는다. 또 그 흔적을 꼼꼼히 소개하는 저자의 정성이 잘 다린 찻잎 마냥 독자에게 향긋하게 전해진다.

여유와 긴장을 고루 부린 우정

저자는 무리지어 영합하는 사람들의 사귐을 경계하며 독립적인 개인의 자유로운 우정을 강조한다. 무리지어 영합한다는 것은 스스로 설 힘이 없어 집단에 함몰된 소인의 사귐이며, 지속성을 강요하는 구속 역시 홀로 설 힘이 없는 정신의 어리광에 다름없다. 그래서 서로 사상과 삶의 조건을 관용하는 우정은 고독을 감내하는 성숙한 인격에 어울리는 몫이다.

개인의 의지를 강조했던 니체는 "가장 좋은 친구는 서로에게 딱딱한 침상이 되어주는 자다"라고 이야기했다. 니체에게 친구란 퍼질러 쉬는 침상만도, 딱딱한 적만도 아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거문고 줄의 튕김과 현과 현 사이의 울림을 기다리는 여백. 여유와 긴장을 고루 부린 한 편의 시와 같은 우정. 그것이 짧더라도 오래 남는 향의 비결이다.

개인은 독립적이다. 그러나 유물론적으로 말하자면 개인 역시 현실 조건에 발을 디디고 있기에, 네 귀퉁이가 현실에 묶여 있기에, 조건을 무시할 수 없다. 사람 간의 사귐 역시 현실의 조건들이 어우러지는 교환의 장이다. 0과 1의 무수한 조합인 디지털 시대, 사람 간의 사귐은 더 빨리 이루어졌다가 더 빨리 해체된다.

그러나 조건만으로 사람을 해부하다가 보면 결국 그것들이 한 덩이로 이루어진 온전한 한 '인간'을 잊고 만다. 사람은 조건 속에 살지만 조건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종종 이를 잊어버리고 말면 사람은 도구화되며 사람을 도구로 대할 때 사귐은 천박해진다.

본문 중 유몽인이 당색이 다른 벗인 이정구에게 건넸던 편지에는 정치 계보를 떠난 독립적인 사람들의 변하지 않는 우정을 청하고 있었다. 세상을 향하는 진심만큼 그것을 향하는 방법이 달랐던 이들은 정적이 되기도 한다. 때로 현실의 조건과 삶의 기반을 취하려는 비장함은 사람 간의 반목과 불화, 더 나아가 사화와 같은 살육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제반상황을 초월하지 않고도 그 위에서 방법은 다를지언정 인간됨을 논할 수 있는 우정은 그래서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두고 척화와 강화를 각각 주장했던 김상헌과 최명길은 나를 지키되 너를 인정하는 날카로운 시문을 몇 차례 주고받는다. 이들의 소통이 타국에 볼모로 끌려갔을 때 찰나적으로 이루어졌을지언정, 저자는 이들을 우정으로 한자리에 묶어두고 있다. 소통의 성의와 밀도가 중요하기 때문일까.

시, 정제된 대화

한편, 이들의 대화가 '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신들은 말하지 않는다/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사이/그들은 세상을 만들고 부순다'(<대화> 중)라고 했다. 대화는 불완전한 인간에게 필요한 소통 수단이다. 그 가운데 시라는 것은 '사라짐의 순간에 날개를 파닥이는 현존'(<흙의 자식들>중)이며, '불붙은 시에 의한 불같은 예언'(<대화> 중)이다.

시는 정제된 대화이다. 산문이 기나긴 이야기로 속내를 풀어내는 거라면, 시는 신이 번개를 내리치듯이 짧은 순간 오래 묵힌 이야기를 한 획에 담아내는 압축적인 대화이다. 그것를 위해서 빈자리가 있어야 한다. 침묵이 있어야 하고 거리가 있어야 한다.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 핵심을 말하되 바람이 불고 달이 뜨는 정경 속에 정갈히 담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음미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사귐에 가장 어울리는 소통이 아닌가.

덧붙이는 또 한편의 우정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엽서 한 장을 꽂아 <거문고 줄 꽂아놓고>를 건네고 싶어진다. 바쁜 가운데 쉼표를 찾듯이 한 장씩 읽어나가는 여유를 선물할 수 있다. 선인들로부터 오백여 년이 지난 현대의 우정이다.

때때로 아직은 가부장제의 잔영이 드리우는 여자친구들 간의 사귐에 이 책이 촌스러울까 염려는 없다. 물론 배움도 외출도 드물었던 여인들의 흔적은 책에 남아있지 않고, 서술은 굵직한 벼슬을 지냈거나 이름을 날렸던 남자들의 우정 위주이다. 여자는 그네들의 우정에 미녀라는 요기스런 선물로, 혹은 기녀라는 천민의 신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신분제 사회에서 서얼의 울분을 토한 박제가를 끝으로, 책에 언급되지 않은 시대에 새로운 소통을 찾아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기에, 빈부귀천을 떠난 좋은 벗이 되기 위한 정성으로 월나라 민요를 또박또박 엽서에 적어본다.

자네는 수레 타고 내가 삿갓 썼거든
수레에서 내려와 인사를 해주시게
그대가 우산 메고 내가 말을 탔거든
기꺼이 자네 위해 말에서 내리겠네 (본문 중)

덧붙이는 글 | 알라딘 서재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거문고 줄 꽂아놓고/이승수 지음 / 돌베개 / 2006년 9월)


거문고 줄 꽂아놓고 - 옛사람의 사귐

이승수 지음, 돌베개(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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