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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꽃과 푸른 잎, 붉은 줄기의 메밀.
ⓒ 박태신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븟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


봉평 가던 날 하늘은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엷은 구름이 풀어 헤져져 넓게 하늘을 뒤덮곤 했기 때문입니다. 새의 깃털 모양도 만들고 야수의 갈기 모양도 만들고 때로는 기다란 구름기둥도 만들고요. 밤이 되어서는 별빛이 지나가게 자리를 비켜주기도 했습니다.

땅에서는 메밀의 하얀 꽃무리가 은은하게 들판을 수놓았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을 지나 이제 지기 시작할 무렵 찾아간 평일의 한가한 오후였습니다. 메밀은 어디서곤 잘 피어났습니다. 밭에서 쫓겨난 뒤 개울가 옆에서도 들꽃마냥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사실 메밀꽃에게는 이제 한시름 놓는 시기입니다. 9월 중순쯤 '이효석 문학제' 행사가 있을 때는 봉평에 60-70만 명의 관광객이 왔다고 하니 야단법석도 보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개했을 때는 보지 못했지만 저로서는 이렇게 한가한 봉평 메밀밭을 즐길 수 있어 오히려 다행입니다.

몇 년 전 봄 구례의 산수유 마을에 갔을 때도, 산수유 축제가 끝난 그 다음 주라 역시 한가하고 여유있게 산수유를 즐겼습니다. 이렇게 철 지나기 전, 사람들의 흥이 밀려가고 난 후에 즐기는 여행도 권할 만한 좋은 여행 방법 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시골의 장날은 그런 번잡함과는 다르게 소박한 분주가 있어 좋습니다. 봉평장은 2일, 7일에 열립니다. 지난 8월에 봉평에 처음 간 날도 '가는 날이 장날'이었습니다. 메밀의 본고장에 왔으니 메밀을 즐기지 않을 수 없지요. 메밀 전병으로 요기를 하면서 메밀 꽃술 막걸리를 맛보았습니다. 한 병을 다 마시고서 기분좋게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었더랬지요.

두번째로 찾은 것은 말씀드린 대로 이효석 문학제가 끝난 얼마 후입니다. 그 날에는 봉평면 옆 고속버스가 서는 장평 읍내 '장평 메밀 칼국수'라는 식당에서 점심 저녁으로 메밀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전날의 전작이 있어서 그 해장도 겸하는 식사였습니다. 메밀 막국수는 타지에서도 접할 수 있지만 메밀 칼국수는 이곳 강원도 지방에 와야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인 것 같습니다. 메밀 칼국수는 흑색의 메밀 칼국수에 뜨거운 국물이 얼큰하게 배합된 음식입니다. 이 맛 때문이라도 봉평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 '메밀꽃 필 무렵'의 물레방앗간. 작품 속 무대를 형상화했다.
ⓒ 박태신
봉평면에서 발걸음 따라 걷다보면 먼저 물레방앗간을 먼저 만나게 됩니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생원이 성씨 처녀와 사랑을 나눈 곳을 형상화해 놓았습니다. 제가 간 날에는 물레방아 위 수로에 돈나물이 아래로 자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방앗간 처마 밑에도 마치 꽃단을 거꾸로 꽂아놓은 듯이 꽃 한 무리가 피어 있었습니다. 자생적인지 인위로 그렇게 해놓았지만 모르지만 참 보기 좋았습니다. 이 물레방앗간을 보고 그 옆 산자락을 잠시 오르면 이효석 문학관입니다. 봉평은 바로 이 이효석 작가의 고향입니다.

▲ 이효석 문학관.
ⓒ 박태신
산등성이에 지어진 이효석문학관은 참 예쁘게 지어진 건물입니다. 봉평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 원형의 마당을 앞에 두고 단아한 붉은 벽돌로 지어졌습니다.

이효석 문학관의 지붕은 마치 너와 지붕을 연상하는 형태이고 길쭉한 창과, 지붕 밑의 넓은 창이 도드라집니다. 건물 안에는 이효석 작가의 삶과 작품을 면밀히 알아볼 수 있게 상세한 자료들을 비치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작품 속 구절들을 뽑아 적어 놓은 것이 작가의 일면과 문체를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한쪽 칸에는 생전의 작가의 창작실을 사진과 문헌을 근거로 하여 재현해 놓았습니다.

<작가의 방>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강은교, 김용택, 신경숙 님 등의 작가 집을 방문하여 대담을 하면서 서재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작가의 문학세계, 집필과정 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서재를 세세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작가는 어떤 책을 보고 어떻게 책들을 비치하는지 어떻게 영감을 받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읽으며 작가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도 알 수 있습니다.

▲ 이효석 문학관.
ⓒ 박태신
이효석 문학관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내를 꼼꼼히 살펴보면 이효석의 생애와 취향, 문학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이효석은 문학과 예술을 삶의 전부로 받아들인 예술가였습니다. 서구 지향적 모더니스트이기도 했고요. 시대적 좌절 속에서 저항하지도 순응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취향대로 시대에 반응한 존재였습니다.

이효석 작가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은 아름다운 문체와, 인간의 사랑을 깊이 있게 다룬 서정성을 자랑합니다. 내년이 이효석 작가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랍니다. 그래서 그 준비가 한창입니다.

▲ 북카페 '동'. 앞에 메밀꽃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 박태신
이효석 문학관은 전시관 한 동과 북카페 한 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카페 이름이 '동'입니다. 차도 마시며 서점 역할도 하는데 이효석과 관계된 책 뿐만 아니라 다종다양한 책들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외지에 이효석의 작품집 말고도 책이 팔릴까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 두 건물이 감싸고 있는 둥그런 마당이 찾는 이의 발걸음을 시야를 편안하게 만듭니다. 그 마당 너머로 하얗게 피어 있는 메밀밭을 내려 보았습니다. 단연 봉평의 너른 밭에는 메밀밭이 가득합니다. 메밀밭 사이로 꾸불꾸불 길이 만들어져 있어 메밀밭을 거닐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메밀은 꽃이 지고 열매가 맺어지면 11월초쯤 수확하게 될 것입니다.

메밀은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 즉 5색을 갖고 있는 신비한 식물입니다. 청엽(푸른 잎), 백화(하얀 꽃), 홍경(붉은 줄기), 흑실(검은 열매), 황근(누런 뿌리)가 그것입니다.

▲ 흐드러지게 피어난 메밀.
ⓒ 박태신
메밀은 작은 꽃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꽃차례' 꽃입니다. 자세히 보면 한 무리의 꽃들이 뭉쳐 있고 그 바로 밑에는 마치 받침이라도 되듯 잎이 달려 있습니다. 줄기는 정말 붉은 색입니다. 세모 모양의 검은 색 열매도 메밀가루 판매지에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짙은 색들을 안으로 감추고 메밀은 하얀 얼굴로 하늘을 향해 피어납니다.

메밀은 생육기간이 60-100일 사이로 짧습니다. 8월에 싹이 트는 것을 보았는데 9월 하순에 벌써 키가 60센티를 상회할 정도로 빨리 자랍니다. 메밀은 장과 위를 튼튼히 하고 기력을 늘리며 정신을 맑게 하고 오장의 부패물을 없애주는 효능을 지녔습니다.

문학관에서 700미터쯤 찻길을 따라 걸으면 생가가 나옵니다. 실제 이효석의 생가는 아니고 그 원래 모습대로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그 곳을 따라 걷는 길은 메밀밭 따라 가는 길입니다. 차만 지나지 않았다면 훨씬 호젓했을 것입니다.

길을 틀어서 산야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저만치 한적한 곳에 온통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또다른 메밀밭이 저를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가다가 온 밭 한 뙈기에 줄지어 심어진 상추밭도 보았습니다. 검은 비닐 사이를 비집고 나와 자란 상추들이 풍성해보였습니다. 가을은 그렇게 풍성함을 맛보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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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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