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시대, 백탑파(연암 박지원의 그룹, 혹은 북학파) 학인들을 등용하려는 정조와 그것을 막으려는 보수파들의 치열한 샅바싸움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질 즈음. 저잣거리에서 연쇄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사건현장에는 어김없이 당대 최고의 매설가(소설가) 청운몽의 소설이 놓여있다. 의금부 도사 이명방, 정조의 하명을 받고 이 사건을 맡는다. 이 도사는 살인자를 추적하다, 매설가 청운몽에게 강한 혐의를 두고 취조한다. 그러나 청운몽은 온갖 고문에도 무고함을 주장한다.
그런 청운몽이 하루는 이 도사에게 살인현장에 놓여있던 자신의 소설을 보여 달라고 한다. 그것을 본 청운몽, 순순히 자백을 하고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절단되는 참형을 당하면서 이 사건은 끝이 난다.
아니, 추리소설 초반에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잡혀 참형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불멸의 이순신>의 저자라서 그런지 역사 추리소설은 약하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상·하권 두 권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단숨에 끝까지 읽게 하는 재주를 가진, 매우 찾기 힘든 작가라는 것을 이 지점에 이르면 모두가 수긍을 할 것이다. 이유는 청운몽을 참형에 처하고 난 후 동일한 수법의 살인 사건이 또 터진 것이다.
그렇다면 청운몽이 진짜 범인이 아니라는 것인가? 그럼 왜 청운몽은 거짓 자백을 한 것일까? 그리고 왜 살인 현장에 놓여 있었던 자신의 소설을 보고서야 자백을 한 것일까? 혹시, 공범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조정에서는 서둘러 청운몽을 참형에 처하라고 했을까? 단독범행인지, 그리고 살해 동기가 무엇인지 밝혀지지도 않았고 증거도 더 확보해야 하는데 말이다. 갑자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의문들이 우리의 추리력(?)을 자극하며 우리의 뇌(?)를 엉킨 실타래로 만들어 버린다.
쉬울 것 같은 범인 찾기가 이 부분에 이르면 미궁이 아니라 거대한 철옹성을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독자가 이 정도라면 다시 원점에서 이 살인사건을 수사해야 할 의금부 도사 이명방, 그의 머릿속이야 속된 말로 안 봐도 비디오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다. 이게 이 소설의 마력이며, 그래서 두 권을 단숨에 읽게 한다. 그런데 의혹이 있는 부분이나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아마도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으면서 일일이 주요 인물들을 동선을 짚어가면서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바쁜 우리에게 그러한 수고를 하게 한다. 그리고 독자 또한 그 수고를 기꺼이 자청하는 수고로움, 아니 그 즐거움을 선택한다.
도대체 독자들을 그 수고로움에 빠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백탑파 서생 중에 한 명인, 꽃에 미쳐 산다는 화광(花狂) 김진이라는 인물의 등장 때문이다. 청운몽을 참형시킨 이 도사는 우연히 백탑파 서생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거기서 이 도사는 백탑파 서생들이 왕명에 반하는 다시 말해 참형에 처한 청운몽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바로 이때 이 도사에게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바로 연쇄살인범이 참형을 당했는데도 동일한 수법의 살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이 도사는 급히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고, 여기에 김진도 함께 가면서부터 김진은 이 살인 사건 수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명탐정 콜롬보 같은 존재가 된다.
김진은 의금부 도사 이명방보다 항상 한 수 앞을 보았고, 그것은 너무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꼭 그가 진범인 것처럼 말이다. 때론 이 도사를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하고, 그에게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주기도 한다.
꽃에 미쳐 사는 서생이 범인의 심리는 물론이고, 놀라운 무예실력, 그리고 범인의 다음 살인까지도 예측하는 이 놀라운 예지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그에게서 이명방은 매우 놀라운 사실들을 듣게 된다.
이 연쇄살인사건의 진범과 배후가 서로 이익을 위해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아래로는 저잣거리에 소설을 방각(목판에 글자를 뜨는)하는 각수와 그것을 종이에 찍어 유통하는 유통업자, 그리고 위로는 조정의 대신들, 더 위로는 정조까지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살인사건의 배후가 청운몽을 진범으로 몰아서 백탑파의 서생들까지도 엮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도사는 수긍을 하지 못한다. 만약 김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백탑파가 서얼(첩의 자식) 출신들이기에 등용하면 안 된다는 조정의 기득권 세력이 그 배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청운몽이 자백했을 때 그 배후를 밝히라고 정조는 어명을 내렸어야 했다. 그런데 서둘러 참형에 처하라는 어명을 내리지 않았는가. 백탑파를 그토록 아끼면서 조정의 기득권세력의 반대에도 그들을 등용하려고 했던 정조가 말이다.
도대체 김진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즈음에서 독자들은 강한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의금부 도사보다 더 조정의 권력의 역학관계를 소상히 알고 있는 김진. 그러나 저자는 이런 의문을 가질 여유도 주지 않는다.
이 의문의 사나이가 다음 살인이 일어날 곳을 이 도사에게 알려주고 그곳에서 진범을 잡는다. 헉, 그런데 진범은? 이제 이 도사에게는 앞선 모든 의문을 한방에 풀어 줄 배후만 밝히면 된다.
그런데 웬걸, 또 속히 참형에 처하라는 정조의 어명이 내려온다. 도대체 정조는 누구의 편인가?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진범을 참형에 처하는 현장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곳에서 김진은 이 도사를 돕다가 어명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하옥되면서 풀릴 것 같았던 실타래가 다시 더 복잡하게 얽혀버린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이라고 했던가. 그 사건으로 인해 배후의 실체를 밝혀줄 인물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의금부의 동지사 대감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배후를 밝혀 주기는커녕 백탑파를 비판하며 스스로 자결을 한다.
아, 도대체 배후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이런 살인을 자행한 것일까? 당대 최고의 매설가인 청운몽과 그의 소설, 새로운 문화와 개혁을 주장한 백탑파 서생들과 그의 관계, 연쇄살인사건, 그리고 그 살인에 얽혀 있는 조정과 정조, 그 중심을 가로지르고 있는 이 도사와 김진.
언뜻 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계층, 부류의 사람들이 저잣거리 민중들의 소일거리인 소설과 매설가를 두고 벌이는 연쇄 살인사건을 통해 서로 엉키면서 당대에 무엇을 꿈꾸었던 것일까?
어쩌면 김탁환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386세대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살인사건의 배후를 알고 있는 의금부의 동지사 대감이 자결하기 전에 백탑파를 비판한 말 속에서 우린 오늘의 보수·기득권이 진보개혁세력에 품고 있는 생각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여 서책을 읽고 외운 후 힘겹게 과거에 급제하고 열심히 벼슬길에 나아가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 세상에 이보다 더 어렵고 멋진 일은 없으이 너무나도 할 일이 많기에 그것을 뽐내지 않을 따름일세.
그런데 변두리에 있기 때문에 이름값을 하던 자들이 중심에 들어오겠다는군, 아무런 통과의례도 없이, 과거도 치르지 않고, 더구다나 서얼주제에 금상의 눈에 꼭 맞는 문장 몇 개를 지었다는 이유로 그냥 돈화문(조정)으로 들어오겠다는 걸세."
끝으로 기쁜 소식은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된다고 한다. 씨즈 엔터테인먼트에서 김주혁을 주연(의금부 도사 이명방역)으로 캐스팅했다고 하니 원작보다 나은 영화를 기대를 해본다.
덧붙이는 글 | <당신의 책,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