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의 목적지는 에스테야. 22킬로미터를 걸어야 한다. 오전 7시에 알베르게에서 나왔는데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하지만 이날의 걷기는 신체적으로는 힘들지언정 정신적으로는 그야말로 '신바람 걷기'였다.
이유는 역시 알랑이다. 알랑 덕분에 휘가와 호두, 그리고 사과를 공짜로 먹는 등 생각지도 못한 일들로 해피타령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게다가 가는 길에는 왜 그리 포도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지! 보고만 있어도 즐거운 것이, 이곳의 모든 포도밭이 다 우리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다.
순례자의 길을 걷다보면 재밌는 일을 많이 겪게 된다. 첫 번째는 역시 시골사람들과의 만남. 그들의 눈빛에는 '넌 누구니?'하는 질문이 가득하다. 그나마 어른들은 좀 낫다. 아이들은 나와 스요시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검은 머리가 신기한 모양이다. 두 번째는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을 구경(?)하는 일이다.
아침은 알베르게나 바에서 해결하고 나오지만 점심은 길에서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보니 적당한 자리에서 모이게 마련이고 다른 사람들과 합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나는 이들을 유심히 관찰하는데 이게 퍽 재밌다.
바게트에 생선과 토마토를 넣어서 먹는 사람, 삼겹살처럼 생긴 것을 굽지도 않고 양배추 따위와 함께 먹는 사람, 커다란 치즈를 칼로 듬성듬성 잘라 먹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나를 놀라게 한다. 내가 먹는 것도 잊고 쳐다보고 있으면 순례자들, 꼭 내민다. 내가 먹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아나본데 덕분에 별의별 것 다 먹어보는 횡재를 하고 만다.
독특한 수도꼭지의 매력
에스테야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이곳의 알베르게는 꽤 싸다. 하루 묵는 것과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는데 드는 비용이 5.5유로.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아침이 꽤 푸짐하다는 걸 아는지라 다들 얼굴에 방글방글 웃음이 가득하다.
기분 좋게 배정받은 침대를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2층 침대가 두개씩 붙어있기 때문. 이전 것과 비교해자면, 가운데가 약간 파인 더블침대식이라고 해야 할까? 혼자 여행 다니는 사람은 어쩌나, 싶었는데 구석에 일인용 침대가 두루 보인다. 괜찮은 배려다. 하지만 저 자리마저 남아 있지 않다면? 수줍음 많은 사람들은 뭔가 단단히 결심을 해야 할 듯.
샤워를 하고 스요시와 나란히 서서 손빨래를 하다가 각자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서로 놀란 것은, 나는 고이즈미를 알고 스요시는 노무현 대통령을 안다는 것. 특히 스요시는 노무현 대통령 얼굴 특징을 흉내 내기도 해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내가 아베 총리까지 알고 있다고 말했더니 깜짝 놀라며 한국에서 유명하냐고 묻는다. 글쎄, 유명하긴 한데…….
이럴 때는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게 다행이다.
이곳에서도 확인한 사실이지만 스페인의 수도꼭지는 우리와 다르다. 누르면 콸콸 나오다가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멈춘다. 이른바 수동형 자동식인 셈이다. 그런 만큼 손빨래 할 때나 샤워할 때 여러 번 눌러줘야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었나싶어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용할수록 다른 면모를 보게 된다. 물 낭비를 줄인다고 할까? 수도꼭지를 제대로 안 잠그는 곳에 큰 효과가 있을 것 같다. 한국의 공공장소 화장실을 이런 식으로 바꾸면 어떨까? 성격 급하신 분들이 화내시려나?
외국인들을 구경하다가 결심한 것
보통은 짐을 정리하고 빨래를 한 뒤 약간의 휴식 후에 마을로 나가는 것이 내가 보낸 지난 며칠간의 일정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알베르게에서 집중 탐구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양인들의 ‘과장’된 행동에 관한 것이었다.
도대체 그들은 왜 그렇게 과장된 행동을 할까? 대화할 때도 보면 손을 이리 저리 돌리는 것이 심상치 않다.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 게다가 소리 지르는 것은 또 어떤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다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장소인 알베르게 부엌에 공개적으로 잠복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원래 목적과 다른, 전혀 뜻밖의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나’에 관한 것이었다. 첫 번째는 땡큐에 관한 것. 순례자들 사이에서는 음식들을 서로 권하는 일이 많다. 초콜렛이나 빵 등을 자주 권하는데 나 같은 경우 거절할 때 단지 “노!”한다. 그런데 이들을 관찰하다가 내가 땡큐에 인색하다는 것을 알았다. 차라리 남발일지언정, 땡큐를 입에 달고 살자고 결심하게 됐다.
그 다음에는 일종의 ‘반응’에 관한 것이다. 내가 과장됐다고 했던 그들의 행동들은, 내 입장에서 보면 과장이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에 비해 손동작이나 감탄사 등이 굉장히 ‘소규모’인 나는 무뚝뚝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이것은 특히 브라질 아가씨 말루를 보면서 느꼈다.
말로는 상대방이 한마디만 해도, 소리(?)를 낼 뿐만 아니라 중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한다. 몰래 한번 따라해 봤는데 입이 아플 지경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과장스럽게 응답하는 것일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녀와 대화하는 사람들의 눈을 보면 다들 초롱초롱 빛난다. 하기야 누군가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럴 것이다. 때문에 이번에도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크게, 자주, 웃으며, 반갑게 말하자는 것. 잠복의 의미도 잊은 채 다이어리에 그것을 적고 말았다.
그렇게 막 버려도 되는 거야?
“노, 땡큐”를 입에 달기 위해 중얼거리며 에스테야 거리로 나갔다. 이곳에서도 확인해봐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쓰레기에 관한 것! 이곳 사람들은 쓰레기를 막 버린다. 특히 담배꽁초가 그렇다. 그것을 휙휙 던지는 꼴이 길거리를 더럽게 하려고 무슨 결심이라도 한 것 같다. 이를 스요시에게 이야기했더니 스요시도 놀랐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가운데 또 하나 확인한 사실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걸어 다니면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차별이 없다고 해야 하는 걸까? 예전에 여자친구와 함께 담배를 피우다가 할아버지들이나 아저씨들한테 혼난 적이 많다. 그런데 혼난 이유가 좀 다르다. 여자친구는 여자가 담배 피운다고 혼나고 나는 여자가 피우는데 보고만 있다고 혼났다.
이게 참 빈번하게 일어난지라 나중에는 담배 때문에 일부러 카페 같은 곳에 들어간 적도 많았다. 나중에는 그게 일상적인 일이 됐을 정도인지라 거리를 보면서 살포시 웃고 말았다. 스페인 여성들이 한국에 온다면 가장 먼저 겪을 문화충돌은? 답을 흡연문제라고 적고 싶다.
주저하게 만들던 것들, 떠나고 보면……
무슨 이유인지 유명한 것보다 점점 ‘작은 것’을 구경하는 것이 재밌어 지고 있다. 도시에서 소문난 교회나 유적지보다 알베르게 내부의 풍경, 순례자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더 관심을 끌고 있다. 그래서 이날 저녁에는 아예 알베르게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두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내가 신기한지 순례자 할아버지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그리고 잠시 대화. 어느 순간 할아버지가 “학생이야?”라고 물었다. 그 순간, 깜짝 놀랐다. 한국을, 아니, 정확히 오기 전에 걱정했던 일들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걸 기억해낸 것이다. 떠나기 전에, 참 많은 걱정거리가 있었다. ‘이거 해야 하는데’, ‘저거 해야 하는데’하는 그런 것들로, 떠나려는 발걸음을 잡아끄는 족쇄와도 같았다.
더군다나 후회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컸다. 하지만 이 길에서 내가 떠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던가? 그제야 기억해낸 걸 보면 후회 같은 건 없었던 셈이다. 게다가 그 고민들은 또 어떻고?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것이 우습기만 했다. 정말 왜 그랬을까? 에스테야 거리에서 기분 좋게, 한참을 웃었다. 무모한 여행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