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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테야 외곽의 이라체 수도원. 왼쪽에서는 포도주가, 오른쪽에서는 물이 나온다.
에스테야 외곽의 이라체 수도원. 왼쪽에서는 포도주가, 오른쪽에서는 물이 나온다. ⓒ 정민호
산티아고를 향해 걷다보면 몇 시간 동안 마을을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노상방뇨는 필수(?)다. 그래서인지 걷다보면 숲에서 누군가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길이 아닌 곳으로 뛰어가는 사람도 많다.

당연히 우리도 마찬가지. 우리는 서로 당황하지 않기 위해 암호를 정했다. 바로 "삐삐!"라고. 그냥 사라져서 서로 찾느라 몇 번 우스꽝스러운 경험을 해서다.

오전 7시에 알베르게에서 나와 한참을 걷다가 "삐삐"를 외치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저 먼 곳에서 쓸 만한 나무 막대기가 보였다. 양쪽 끝이 뾰족해 불편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물집 때문에 걷는 게 힘들었던 나로선 그야말로 보물을 얻은 셈이다.

내 지팡이(?)를 소개하자 친구들이 감탄했다. 여행 전문가 매튜는, 자연의 지팡이는 길이가 안 맞거나 무거워서 불편한데 내가 구한 건 아주 적당하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메이징!" 타령이다.

길을 걸으며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말하면서도 준비부족을 탓해야 했다. 여행을 급히 준비했기 때문이다. 가고 싶어만 하던 난 비행기 티켓을 상당히 급하게 구했고 그 때문에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구한 티켓은 유효기간이 한 달이었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이동하는 것까지 계산해보면, 산티아고 걷는 길은 최대 26일 정도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로그로뇨에서 레온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야기하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어차피 완주라는 것이 한 순간이 아니라 평생을 거쳐 이뤄지는 만큼, 걷지 못한 길은 다음에 다시 오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문제는 드림팀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겨우 며칠 같이 지낸 건데, 왜 그렇게 아쉬운 걸까? 가뜩이나 마음이 아련해지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걷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정, 파스타를 가르쳐줄게"

알베르게
알베르게 ⓒ 정민호
21km를 걸어서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30분. 마을도 깨끗하지만 알베르게도 깨끗하다. 하지만 햇볕과 비구름이 번갈아 하늘을 지배해,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빨래를 말릴 수 없기 때문이다.

들고 다니는 배낭가방의 무게를 생각하면 옷을 적당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다. 나 같은 경우는 최대한 3일치였다. 그런데 이틀분이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내일까지 이런다면? 맙소사! 땀과 비에 젖은 티셔츠를 또 입어야 한다. 정말, '맙소사'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 마을에 들어갔다. 바로 다용도 칼과 손전등 때문이었다. 다용도 칼이 필요한 이유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길에서 바게트를 먹을 때, 특히 그 안에다 뭔가를 집어넣을 때 아주 도움이 된다.

손전등도 마찬가지. 이곳은 해가 유독 늦게 뜨는지라, 오전 6시 전후에도 알베르게에 불이 켜지지 않으면 짐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다들 손전등을 사용하는데, 준비부족이었던 나 혼자만 라이터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었다. 라이터도 나름대로 쓸 만했지만, 손을 몇 번 덴 후 손전등을 사기로 한 것.

나간 시간은 오후 4시. 아뿔사! 또 시에스타(낮잠자는 시간)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이 사람들은 정말 속 편하다. 성과 없이 돌아오는 길, 마이키가 파스타를 가르쳐주기로 했다. 파스타 만드는 걸 배우면 돈을 상당히 아낄 수 있다는 것을 아는지라 아주 반가웠다. 팔푼이처럼 입에서는 연신 "앗싸!"만 나온다.

"서울은 여행하기 좋아?"

먼 곳에서 온 동양인에게 유독 친절했던 포와 브라우어닝 모녀
먼 곳에서 온 동양인에게 유독 친절했던 포와 브라우어닝 모녀 ⓒ 정민호
알베르게에 붙은 마을지도에서 우체국 위치를 찾고 있을 때였다. 전날 내 바디랭귀지에 까무러쳤던 장발의 이탈리아 아저씨가 와서 인사한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이라고 했더니 서울을 이야기한다. '오호!'하고 반가워하던 내게, 궁금했다며 묻는다. 서울도 여행하기 좋으냐고.

막상 입이 안 떨어졌다. 서울이 여행하기 좋은 곳인가? 서울 곳곳을 많이 다녀봤지만 그건 여행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잠시 여행지로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이번에도 입이 안 떨어진다. 이곳을 걷는 사람들이 단순히 유명한 장소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 그랬다. 서울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결국 "미안해, 나도 서울을 여행해본 적이 없어"하고 말했다. 이탈리아 아저씨, 상당히 의아한 표정이다. 그래서 활짝 웃어줬다. "메이비…, 서울, 베리 굿!"이라는 말도 해주고. 그럴 것이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서울도 서울만의 여운이 있겠지. 스페인 마을에서 서울여행을 결심했다. 참, 엉뚱하게도.

도대체, 왜?

정통 멕시코 수프를 만드는 장면. 알베르게 부엌에서는 세계 요리를 구경할 수 있다.
정통 멕시코 수프를 만드는 장면. 알베르게 부엌에서는 세계 요리를 구경할 수 있다. ⓒ 정민호
저녁 시간. 만찬이 벌어졌다. 만찬이라고 해봤자 레스토랑에 비하면 별 것 아니겠지만, 그곳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정성이 가득 담긴 만찬이었다.

그런데 알랑은 먹는 와중에도 자꾸만 부엌을 오갔다. 도대체 왜 그러는가 싶었는데, 알고 나서 깜짝 놀랐다.

전에 내가 좀 '익숙한' 샌드위치를 먹어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생선과 빵을 함께 먹는 등 먹기 전에 상당한 결심을 해야 하는 게 우스꽝스러워서 무심코 한 말이었다.

그런데 알랑은 그걸 기억했다. 내 앞에 나타난 건 오믈렛을 넣은 바게트와 삶은 감자들이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친구들이 준비한 빵과 초콜릿들도 있다.

"정, 포 유(for you)"라는 말을 들었을 때,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도대체 왜?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우리가 함께 한 건 고작 며칠인데 왜 그렇게 잘해주는 거예요? 다들 뭣 때문에? 나는 해주는 것도 없는데? 아파서 짐만 되는데.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게 발이 괜찮은지 물었고, 내가 음식 만드는 것을 구경했던 포와 브라이어닝 모녀가 자신들의 것을 먹고 가라고 나를 잡는다.

왼쪽부터 알랑, 스요시, 마이키, 매튜
왼쪽부터 알랑, 스요시, 마이키, 매튜 ⓒ 정민호
밖으로 나오자 '도대체 왜?'라는 생각만 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고작해야 함께 걷는다는 것뿐이다. 그래도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도대체 왜? 겨우 그것 때문에? 언제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결심했다.

'당신들에게 받은 것들,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줄게요. 꼭 그럴게요.'

뜨거운 것 참아내느라 유독 눈이 아픈 날이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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