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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게에서 먹는 것이 여행경비를 아끼는 지름길이다.
ⓒ 정민호
북적거리는 알베르게에서 아침을 먹고 나온 시간은 6시 40분. 세상은 아직 캄캄하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스페인은 해가 늦게 뜨고 늦게 진다. 해를 피해 걸어야 하는 순례자들에게는 확실히 좋은 일이다.

이날의 목적지는 팔라스 드 레이다. 24㎞를 걸어야 하는데 이 길을 걷는 것이 유난히 재밌다. 왜 그런가 하면 포도밭이 천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안 보이던 사람들이 두더지게임의 그것들처럼 쏙쏙 일어나는데 그걸 보는 재미도 즐겁고, 보면서 포도 따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햇님과 빗님이 내기라고 하시는가? 비가 내려서 긴 옷을 입으면 해가 뜬다. 옷을 벗으면 다시 비, 옷을 입으면 다시 해가 뜬다. 참으로 변덕스러운 날씨! 아예 점심을 먹을 생각으로 자리를 잡은 뒤에 운수를 빌어볼 겸 바나나 조각을 던지며 "고시레~"를 외쳐보지만, 소용없다. 되레 비만 쏟아진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비닐우비를 꺼내야했다.

같은 길에서 발견하는 다른 생각

▲ 산티아고 가는 길
ⓒ 정민호
길을 걷다보면, 땅만 보며 걸을 때가 있다. 그러다보면 문득문득 놀라고 만다. 여기 외국이야?,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길은 참 똑같다. 진흙길도, 숲길도 심지어 아스팔트길도 내가 사는 동네와 별반 다른 게 없다. 그런데 왜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렇게 다른 걸까?

오후 1시 40분, 알베르게에 도착해서도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호스피탈레로가 내가 배정받은 방이 위에 있다는 말을 할 때였다. 나는 "2층?"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농, 1층!"이란다. 1층이라면 부엌과 수다방 밖에 없는데?

아, 그때서야 생각난 것이지만, 이들의 1층 개념은 우리의 것과 다르다. 그전에는 이게 그러려니, 했는데 이 순간만큼은 정말 궁금했다. 너희와 우리랑 '왜' 다르니? 정말 물어보고 싶지만, 바디랭귀지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것도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햇님과 빗님은 여전히 뽐내기를 하고 계신다. 이런 까닭에 빨래터 이용은 불가능. 방안에서 나름대로 공간을 이용해서 빨래를 널어야 한다. 나는 지팡이를 이용했다. 지팡이를 벽에 기대어 그 위에 양말들을 올려놓는 것! 나름대로 뿌듯해하며 돌아보니 역시 고수들은 달랐다. 캐나다에서 온 할머니는 가방에서 줄을 휙 꺼내더니 벽에 샥 하고 건다. 그것으로 빨랫줄 완성! 그 여유 있는 공간들이라니! 감탄할 따름이다. 역시, 경험의 차이다.

사하밀? 사라밀? 사흐하밀?

▲ 팔라스 드 레이
ⓒ 정민호
시에스타(낮잠)가 끝나는 오후 5시, 슈퍼로 향했다. 걸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마을이 참 아담하고 예쁘다. 또한 고풍스럽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넉넉해지는 느낌. 거리들이 예쁜 건 또 어떤지! 나름대로 신경 쓴 기색이 역력하다! 골목길 기웃거리다가 멍멍이의 습격을 받는 소동이 있었지만, 그래도 입이 쉬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중심가에 있는 슈퍼에 들어가면서 나는 결심을 했다. 그것은 매튜가 알려줬던 '사라밀(사하밀?)' 사기였다! 그동안 바게트에 치즈와 채소, 과일을 넣어서 먹었지만, 이제는 때가 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씹는 느낌이 없어서 여간 허전한 것이 아니다. 겨우 매튜가 준 걸 한번 먹었을 뿐인데, 슈퍼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 목구멍은 꼴깍꼴깍 거린다. 완전히 갈빗집에 들어가는 폼이다.

그런데 이런… 냉장고를 보며 갈등하고 만다. 사라밀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스펠링이라도 보면 나을까 했지만, S만 똑같을 뿐, 영 아니다. 이게 사라밀인가? 저게 사라밀인가?, 하는 생각만 여러 번! 괜히 익혀먹어야 하는 것을 잘못 골랐다가 이상한 병에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만 들고… 결국 눈을 감고 하나 골랐다.

그렇게 하여 계산대 앞에 섰는데, 아무래도 불안했다. 일단 직원 아주머니에게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어봤다. 세상에, 내가 그런 질문을 하다니! 그러나 아주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한다.

이런! "이거, 사하밀?" 아주머니는 알쏭달쏭한 표정만 짓는다. "사라밀?", "사하하밀?", "사르아밀?", "사흐르밀?", "사히밀?", "사르밀?"이라며 무리하게 혀를 굴렸건만 아주머니는 어색하게 웃기만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다면 결국은 바디랭귀지인가? "아줌마, 이거 바게트랑 믹스해서 먹어도 되는 거예요?"라는 말을 손짓과 함께 하는데 아주머니는 여전히 어색하게 웃는다. 다시 문장 만들기. "마드모아젤. 이거 바게트랑 믹스해서 냠냠해도 돼요?"라고 했더니 그때서야 아주머니가 웃으며 "농!"한다.

아, 먹으면 안 되는 거였구나!, 하며 돌아서는데 나를 붙잡는다. 그러더니 오케이, 란다. 으잉? "이거랑 이거랑 믹스해서 냠냠?" 이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또 아니란다. 도대체 뭐야?

한참을 그렇게 설왕설래하는데 마을 사람이 끼어들더니 통역(?)을 해줬고 그때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이어서는 민망해서 커다란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유인즉 이렇다. 일단 내가 고른 건 먹는 게 맞았다. 문제는 내 질문을 아주머니가 오해한 거다. 바로 아주머니에게 먹으라고 하는 줄 알았던 것! 울랄라, 울랄라! 어찌 이런 일이! 나도 웃고, 아주머니도 웃고, 끼어든 마을 사람도 함께 웃는다.

노인 앞에만 서면 고개 푹 숙이고 "올라..."

▲ 알베르게
ⓒ 정민호
레온에서부터 걸으면서 느낀 것이지만, 유달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다. 그건 별 문제가 아닌데 나만의 문제가 생기고 있다. 그것은 내가 외국어를 듣는 순간, 또한 용을 쓰며 문장을 만드는 순간, 일단 '반말직역'으로 사고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다. 전공교수님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넌 절대 번역가하지 말라는 충고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나름대로 잘 견뎌왔다. 젊은이들이 많은 탓일 게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자꾸만 버릇이 고개를 들고 있다. 때문에 먼저 말을 붙이기가 어렵다. 가령, 또래에게는 "너 이름이 뭐야?", "어디에서 왔어?"가 스스럼없이 나오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는 그게 안 된다. 말 하려는 순간, 입이 안 떨어진다. 반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올라!"하고 인사하는 것도 마찬가지. 눈을 보고 해야 하는데, 자꾸만 고개를 숙이면서 "올라!"하고 만다. "이러면 안 된다"고, 길을 떠나는 순간부터 길을 걷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다짐했던 건데, 정말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재밌고 도움도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기회를 박차는 것이 아닌가 걱정만 된다.

무모하게 떠난 여행, 이런 복병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말 어찌해야 하나? 찢어져가는 가방 끈과 함께 그것이 내 마음을 북북 긁어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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