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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가는 길
ⓒ 정민호
아르주아를 나서는 아침, 발에 힘을 줘본다. 이날 걸어야 하는 거리는, 코스상으로는 35km다. 도착지는 몬테 델 고조. 산티아고 바로 5km 전에 있다. 그런데 실제로 걸어야 하는 거리는 40km가 넘는다. 왜냐하면 중간에 산티아고 공항을 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소심하다. 그래서 안 그래도 된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공항에 가는 모험수를 벌이기로 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약한 날에 산티아고 공항에서 파리로 돌아가는 저가 항공기를 타야만, 그 다음날 무사히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산티아고에서 파리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넉넉히 잡아도 하루 이상은 걸린다. 잘못하면, 귀국행 비행기를 놓친다.

아름다운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과 설레는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 눈은 공항 간판을 찾기에 바빴다. 그리고 마침내 몬테 델 고조 7km전에 있다는 걸 알아냈다. 함께 걷던 사람들과 헤어진 뒤 나 혼자 이탈했는데 비가 쏟아진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 외국에 와서 이렇게 많이 걸어본 것이 처음인지라 지칠 대로 지친 몸이지만 포기할 수 없었고 기어이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 비하면, 정말 작은 곳이었다.

공항에서 쓰러진 사연

▲ 내 신분증. 자연에서 얻은 지팡이는 끝이 저렇게 닳을 만큼 내게 힘을 준 소중한 친구였다.
ⓒ 정민호
산티아고에 가기 전, 내 고민거리 중에 하나는 돌아오는 방법이었다. 다른 여행기들과 마찬가지로 산티아고를 말하는 여행기들은 ‘돌아오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오란 말인가? 산티아고에서 마드리드로 간 다음에 그곳에서 파리까지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나? 아니면 산티아고에서 다시 생장피드포르로 돌아가서 TGV를 타고 파리로? 그것들 때문에 소심한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나를 구원해준 것은 카미노 커뮤니티였다. 인터넷의 힘, 바로 그것이다. 이미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이 산티아고에서 파리로 가는 ‘저가항공기’라는 것이 있다고 알려줬다. 비용은 37유로 남짓. 놀랍게도 외국인들도 이걸 잘 모른다. 여행 고수 미츠에만 해도 산티아고에서 파리까지 가는 버스를 100유로 주고 이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걸리는 시간은 하루라고 하는데, 그런 만큼 내가 한국에서 예약한 사실과 금액을 알려주니 한국의 인터넷에 감탄하고 만다.

한국에서 예약한 것만 믿고 있던 나였지만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하니 불안해진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예약된 화면이 인쇄된 종이 한 장이 전부다. 만약 이것이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아찔한 마음에 일단 보이는 직원부터 붙잡았다. 그랬더니 부스 창고를 알려준다. 저가항공기도 종류가 다양하다는 걸 처음으로 확인하며 사람들이 알려준 곳으로 갔다. 다짜고짜 종이를 내밀었다. 직원이 “농!”이라고 외친다.

노? 몇 년 전 수술한 뒤에 무리하게 일어섰다가 세워둔 종이가 쓰러지듯 맥없이, 철퍼덕 주저앉아버린 적이 있었다. 경험한 사람만 아는, 다리에 힘이 탁 하고 빠지는 그것인데 여기서도 그랬다. 창피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아니라니? 난 어떻게 하라구? 사막에서 홀로 버려진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직원이 뭐라고 솰라솰라하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막막할 뿐이다. 눈앞이 온통 어둠이다! 오로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걱정뿐이다. 그때 직원이 종이에 동그라미를 치더니 내 눈앞에 내민다. 어라? 직원이 말한 ‘노’는 예약한 날짜가 오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 외국말도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것이었다. 민망해서 스스로를 욕(?)하며 멋쩍게 옷의 먼지를 털어야 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는 기분이 이런 것이 아닐는지? 그래도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분 좋게 웃으며 나왔다.

산티아고가 보인다!

▲ 몬테 델 고조 입구에 놓인 조각상
ⓒ 정민호
공항을 나오니 4시가 가까워진다. 배가 고파서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살라미도 넣고, 치즈도 넣고, 약간의 양배추들도 넣어준 뒤에 한입 물었는데 그 맛이 꽤 고소하다. 차 타고 가는 사람들이 나를 뚫어지게 본다. 하기야 공항에서도 동양인을 보지 못했으니 그럴 법 하지만, 뭐 어떤가. 손 흔들어주면 그만인 것을.

알랑, 마이키, 스요시, 매튜. 이런 내 모습, 이제는 좀 어울리지? 여행자답지? 그들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어디선가 걷고 있을 내 소중한 친구들이여! 부엔 카미노! 몬테 델 고조에 도착한 시간은 5시가 조금 넘었는데, 맙소사! 굉장히 크다. 몇 백 명도 수용 가능할 것 같다. 알베르게가 작은 마을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시원시원한 대머리가 보기 좋은 호스피탈레로는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한국말로 “웰컴”이 뭐냐고 묻는다. 웃으며 말해줬더니 입을 오물 오물거린다. 그리곤 하는 말, “쏘리!”. 하지만 그것이 뭐 중요할는지. 말보다 마음과 웃는 얼굴이 더 반가움을 표현해주는 것일 텐데. 대머리 아저씨, 제 말 맞지요?

짐을 정리한 뒤에 알베르게를 나왔다. 설마 했는데, 저 멀리서 산티아고가 보인다. 새삼스럽게 이곳까지 오던 길을 떠올려봤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놀랍다. 산티아고에 들어가기 전날이라 그런지 다들 흥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들 사이에서 나도 수다를 떨고 요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래봤자, 겨우 계란 삶는 수준이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을까

▲ 알베르게
ⓒ 정민호
베네수엘라 남자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더니 자신은 한국 낭자와 함께 걸었었다고 한다. 자주 들었던 한국 낭자 두 명인가 했더니 한 명이란다. 그렇다면 다른 한국인이 또 있었다는 말인가? 이 청년, 한국 낭자가 친절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다. 암, 그렇지. 한국인이 좀 친절하지. 내가 다 흐뭇해진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는데 막상 듣고 나서 당황했다. 이름이 르에르끼? “르에르끼?”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참, 발음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어서 난감해하는데 이 청년이 다이어리를 보여준다. 한국 낭자가 작별의 인사로 쓴 한국어를 번역해달란다. 어려운 문장이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기초(?)적인 문장들이다. 그래서 번역해주기로 하고 봤는데, 일단 이 청년의 이름이 ‘앤드리코’라는 걸 알았다. 뭐지? 내가 르에르끼라고 불러도 대답했잖아? 내 발음이 그렇게 이상한가? 민망함을 감추며 번역을 시작했다. 내가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는 날이 오다니? 하면서도 신기하다.

내 입을 빤히 쳐다보는 앤드리코, 너무 좋아한다. 내가 단어 하나하나 꺼낼 때마다 행복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래, 그 심정 알지. 나도 그런 걸. 지나간 추억들 하나하나가 다 보이지. 그 시간들이 다시 만져지는 것 같지. 그 시간들, 절대 잊을 수가 없지. 국경이라는 것도, 언어라는 것도 다 부차적인 것이지. 그렇지 않니?

어디였더라. 길을 가다가 힘들어서 도로 옆에 앉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내 뒤에 오던 순례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봤었다. “괜찮아?”, “응. 아주 좋아.”, “정말?”, “진짜야.”라는 대화를 몇 번이나 나누었던가. 자주 봤던 사람도, 처음 보는 사람도 자꾸만 물어대기에 일어나야만 했다. 나 때문에 멈추는 그들에게 미안해서였다. “편히 쉴 수도 없잖아”라며 투덜거리면서 다시 걸었었다.

그때, 생각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이렇게 고마워했을까. 이 오래된 길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미안해서 쉬지 못하고 일어났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국의 친구를 기억하고 그것으로 웃으며 지내고 있을까. 소중한 우정을 얻고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간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생각나서인가. 마지막 문장에서 목이 멨다. 앤드리코는 내가 단어를 몰라서 그러는 줄 알고, 문맥을 고려해서인지 “위시? 럭키? 굳?” 등을 말한다.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고 "앤드리코, 너랑 같이 걸어서 너무 좋았대. 앞으로도 네가 잘 걷기를 바란대. 너한테 고맙대"라고 급히 말했다.

처음이 아닐까? 처음이다. 짧은 문장이라도 이렇게 외국어가 술술 나오다니. 좀 더 일찍 나와 주지. 그럼 좋았을 텐데….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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