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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가는 길.
ⓒ 정민호
오전 6시 20분에 아스토르가 알베르게를 나서려는 순간, 입술부터 깨물었다. 발바닥 한복판에 자리잡은, 고름 나오는 돌연변이 물집이 만만치가 않다. 잘못 밟으면, 바늘에 찔린 것 같은 통증에 아찔하다. 쉬어야 하는 걸까? 욕심을 내서 걸어보지만 이내 발목이 뻐근해진다. 걷는 자세 때문이다. 발가락에 힘을 준 채 걷다 보니 평소보다 두 배 세 배 무리가 간다. 죽겠구먼, 하는 신세타령이 입에서 술술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길, 친절한 사람들

그럼에도 가는 길은 즐겁다. 처음은 스페인 아저씨 때문이다. 이름은 무헤르. 아내와 함께 걷는데 오직 스페인어만 할 줄 안다. 그런 아저씨가 내게 접근해오더니 솰라솰라 한다.

"농! 에스파뇰!"이라고 했더니, 그때부터 수업(?)이 시작됐다. 무헤르의 스페인어 특강(?)이었다. 특강이라고 해봤자 별것 없다. 무헤르가 사방을 둘러보며 단어를 알려준다. 나는 그것을 발음해 보고 무헤르가 교정을 해준다.

처음에는 '이 아저씨가 왜 이러나' 했다. 내가 이 단어들을 왜 알아야 하나 싶었는데…, 그 마음이 느껴졌다.

무헤르는 아무 단어나 알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 횡단보호, 지팡이, 비, 바, 호텔, 물, 가방, 신호등… 그것들은 산티아고 가는 길에 몇 번이고 말해야 하는 단어들이었다. 비록 그날 외운 것은, 이글레시아(교회)밖에 없지만, 마음은 꽉 차오르고 있었다.

▲ 화살표만 따라가면 길 잃을 염려가 없다.
ⓒ 정민호
13km를 걷다가 다시 바에 들렸다. 오전 중에만 세 번째로 들리는 것이다. 평소라면 하루에 한두 번 가는 바였지만, 다리 때문에 쉴 곳이 보일 때마다 쉬고 만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으윽' 하는 소리가 나온다.

이미 자리잡고 있던 프랑스 할머니들의 시선이 내게 쏟아지는 걸 느끼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랬더니 할머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솰라솰라 한다. 왜였을까? 그 말들을 들으며 문득 내가 깊은 산 속에서 새들의 아름다운 지저귐을 듣는 한가로운 나무꾼처럼 여겨져 피식 웃고 말았다.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할머니들이 보디랭귀지로 대화를 걸어왔다. "야, 가방 다시 매!", "왜요?", "일단 매라니까!"라는 대화 끝에 시키는 대로 했다. 이럴 수가! 누군가는 뒤에서 내 가방을 힘주어 올리고, 양옆에서는 가방 끈을 꽉 조여 맨다.

그때야 알았지만 내 가방은 처질 대로 처져 있었고, 그 때문에 더 힘이 들었던 것이다. 마이키에게 배운 프랑스식 감사 인사 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할머니들, 메르시 부꾸!"

슬로우, 슬로우

21km 지점을 지나자, 라바날 델 카미노가 나타난다. 시간은 오후 12시를 막 지나는 참이다. 마음먹은 대로라면 5km를 더 가서 폰세바돈까지 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걷는 자세 때문인가? 발바닥의 감각이 이상하다. 절뚝절뚝. 노를 젓듯, 양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걷는 괴상한 동작까지 취하고 말았다. 이 걸음이 특이하긴 특이했나 보다. 이상한 느낌에 돌아보니, 할아버지들이 날 찍고 있다.

"괜찮아?", "네. 트레 비앙(아주 좋다)이에요.", "진짜? 여기서 쉬어. 알베르게가 저기에 있어.", "아니요. 베리 굿이에요. 고마워요.", "좋아. 부엔 카미노!" 아, 솔직해야 하는 건데! '베리 굿'은 무슨 얼어 죽을 베리 굿! 한 번만 더 물어봐 줬으면,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갔을 텐데 결국 노 젓기 방법으로 계속 걸었다.

▲ 폰세바돈 가는 길. 오르막길이 만만치 않다.
ⓒ 정민호
길이 의외로 험하다. 또 계속 오르막길이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이미 1시간이 지났는데 마을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다. 꽤 높은 언덕만 보인다. '저것만 지나면 나오겠지' 하고 올라가면 또 언덕. '저것만 지나면 나오겠지' 하고 기어가다시피 했더니 또 언덕이다. 멍한 정신으로 올라갔더니, 그제야 저 멀리서 마을이 보인다. 시계를 봤다. 오후 3시가 넘었다. 5km 걷는데, 3시간이 걸렸다는 것인가?

이게 무슨 5km야!,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발이 꼼짝을 안 한다. '하늘이 노랗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끝이 바로 앞인데, 왜 이러는 걸까?

지팡이에 기대서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내 뒤에서 걸어오던 순례자가 내 옆에서 딱 멈췄다. 목석처럼 생긴 남자인데 물집 때문에 그러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슬로우, 슬로우, 슬로우, 슬로우…"라는 말만 반복한다.

잠시 후, 그 남자의 '슬로우, 슬로우'라는 단어와 함께 다시 걸었다. 그렇게 하여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직전. 호스피탈레로가 주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보니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밖에 나가보니 더 가려는 듯 계속 걷고 있다. 아주 슬로우, 슬로우하게. "부엔 카미노!", 그 말밖에는 할 것이 없다.

제발 러브 송을 들려줘!

▲ 알베르게.
ⓒ 정민호
사생결단! 이를 꽉 깨물고, 고름 나오는 물집과 전쟁을 벌였다. 그래 봤자 주사기 들이미는 것이지만, 아아! 뭔가가 쭉 빠져나가는 것 같은 그 아찔함이란! 발바닥이 다 얼얼하다. 언제쯤이면 물집 없이, 자유로이 훨훨 걸어갈 수 있을까?

저녁은 이곳의 알베르게에서 차려준 것(7유로)으로 먹었다. 알베르게에서 아침 먹은 적은 있어도 저녁은 처음인지라 상당히 기대했는데…. 이런! 파스타와 기름기 찰찰 넘치는 참치가 성을 쌓고 있고, 그 위에는 익다만 계란프라이가 흐느적거리고 있다. 이걸 먹으란 말이야? 무심코 툭 건드려봤더니 성이 와르르 무너진다. 접시 위에는 그야말로 기름기의 홍수! 아아, 이 느끼함을 어찌 감당하란 말인가? 고개를 들고 보니 다들 잘만 먹는다. 신기한 사람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스페인 아저씨 페르난도, 이탈리아 청년 안토니아, 그리고 연주가 장 마리가 함께 있다. 인터내셔널 테이블이라는 말이 나오기 마련.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에서 종교 믿으면 어떻게 되느냐, 너희 나라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정말 1%도 안 되느냐 등 참으로 엉뚱하면서도 정치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유쾌한 수다가 이어졌다.

후식이 나올 때, 페르난도가 놀라운 제안을 했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으니 국가의 노래를 부르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마지막으로 배치(?)한다. "지금은 널 위한 시간이야!"라면서.

▲ 어디서나 연주하던 장 마리. 문제는 한곡만 연주한다는 것이다.
ⓒ 정민호
시작은 스페인. 노래가 우렁차다. 그 뒤로 다양한 노래들이 나오는데 다들 신명나다. 특히 프랑스는 장 마리가 악기를 갖고 있는 데다가 할머니들이 화음까지 넣는 놀라운 재주를 선보여 단연 최고였다.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됐다. 애국가를 이런 곳에서 부르게 될 줄이야! 그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애국가라는 노래의 분위기였다.

긴장감 끝에 결국, 불렀다. 주위가 조용해진다. 다들 고개만 끄덕끄덕.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적막함이 감돈다. 그때 페르난도가 내 눈을 뚫어지게 보더니 부탁한다. "너희 나라 러브 송도 불러줄래?"라고. 러브 송? 우리나라에 러브 송이 있던가? 무지한 탓에 고개를 갸우뚱. 페르난도는 꼭 듣고 싶다며 난리고 장 마리와 안토니오는 손뼉부터 친다.

러브 송이 있었나? 아! 러브를 사랑으로 바꿔야 하는구나. 사랑 노래가 있었나? 그렇다면, 사랑가? 내가 춘향전을? 가능할까? 불가능해! 혼자서 고민하는데 다들 계속 "플리즈!" 타령이다. 난감한 상황.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쏟아진다. 다들 "뷰티풀!" 타령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스페인 높은 곳에서 아리랑을 부를 줄이야! '아리랑'이라는 단어에 이들이 이렇게 감탄할 줄이야! 유쾌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로 유명하다. 야곱 성인이 스페인 서북지방인 갈리시아 지방에 묻혀 있어서 종교인들은 이곳까지 걸어서 가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종교적 이유가 아닐지라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걷기'의 즐거움을 가득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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