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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능란해진 아이들이 남은 볏단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 정일관
아침으로 지독한 안개가 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하더니, 낮에는 상당히 더운 날들이 계속되어 참 따뜻한 가을을 보내고 있는 요즘입니다.

학교 뒤쪽으로 쭉 심어놓은 모과나무에서 올해도 모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향기를 품고 있거나, 제 무게에 겨워 떨어져 뒹굴기도 합니다. 그러나 떨어진 모과를 아무도 주워가지 않습니다. 아깝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평화롭습니다.

경남 합천 적중면에서 100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공동체 생활을 하며 대안교육을 일구어가는 원경고등학교에서는 지난 지난 10일부터 19일까지 열흘간에 걸쳐 학교 뒤에 있는 실습 논에서 가을걷이를 하였습니다.

▲ 논에 뉘여 말리고 있는 벼를 뒤집고 있습니다.
ⓒ 정일관
이미 작년에 학교 주변의 너른 들에 벼농사를 하는 지역의 특성을 살려 논농사를 중요한 자연 친화교육의 하나로 설정하고 모내기로부터 탈곡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이 직접 참가하여 체험하는 교육을 하자고 함께 결의한 바를 실행한 것입니다.

자연 친화교육은 특히 학교가 농촌 지역에 있으면서도 그 지역과 함께 하지 못하거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머무르기도 하고, 고비용의 해외 여행을 중요한 체험학습으로 다투어 제공하려는 대안학교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우선 학교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자연 친화 체험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 계획으로 6월엔 전교생과 전 교사가 함께 나가서 팔다리 걷어 부치고 손으로 심는 모내기를 하였고, 작물 재배 시간을 이용하여 잡초 뽑기를 계속해 오다가 10월 10일 첫 벼 베기를 하였습니다. 벼 베기 역시 콤바인을 동원하지 않고 낫으로 베게하였죠.

베어 낸 벼는 논에 누워서 따스한 가을 햇살에 말라갔고, 아이들은 반별로 나와서 벼 뒤집기와 묶기를 하였습니다. 벼 묶기는 탈곡을 위해 적당한 뭉치로 묶어서 쌓아두는 일인데, 일일이 손으로 묶어야 하기에 시간과 일품이 많이 들어 아이들이 힘들어하였습니다. 따가운 가을 햇살도 아이들에게 경계 1호였습니다.

▲ 교장 선생님의 탈곡 시범(왼쪽), 학생들이 나락이 잘 떨어지는 탈곡기에 마냥 신기해 합니다.
ⓒ 정일관
말리고 뒤집고 묶고 쌓아둔 벼를 탈곡하는 일은 지난 17일에 시작하였습니다. 1시간에 한 반씩 논에 나가 나락을 떨었는데요, 탈곡기는 다름 아닌 완전 수동 탈곡기였습니다. 전기 에너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오직 사람의 힘만으로 돌리는 옛날 탈곡기로 농가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는 것을 어렵사리 구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세 명씩 한 모둠으로 만들어 한 아이는 페달을 밟아 돌리고, 한 아이는 돌아가는 탈곡기에 볏단을 올려 나락을 떨어내고, 한 아이는 다 떨어낸 짚단을 받아넘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너른 논에 덩그러니 갖다놓은 작은 수동 탈곡기 한 대를 보니, 콤바인 등 기계에 비해 무척 초라해 보였고, 이 많은 나락을 어떻게 저 작은 기계 하나로 다 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막상 탈곡기를 돌려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허름한 수동 탈곡기는 페달을 밟자 맹렬히 돌아갔고, 도무지 떨릴 것 같지 않던 나락들이 사정없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 여학생들도 나락을 떨어내고 싶어 합니다.
ⓒ 정일관
▲ 한 여학생이 탈곡기에도 떨어지지 않은 나락을 손으로 훑어내고 있습니다.
ⓒ 정일관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러대었습니다. 그러면서 신나게 페달을 밟았고, 나락들은 쌓여갔습니다. 저도 재미있고 신이 나서 아이들에게 시범을 보인다며 연신 나락을 떨었습니다.

나락들이 하도 강하게 튀어나가는 통에 비닐 막을 씌웠고, 볏단 안쪽에서 미처 탈곡되지 못한 나락들은 다른 아이들이 손으로 하나씩 훑어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탈곡이 끝난 짚단은 아이들에게 따로 쌓아두게 하였죠. 지나가는 마을 농부님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어이구, 일꾼들 많네."

이렇게 1, 2학년 4개 반이 한 시간씩 탈곡 작업을 오전에 체험하게 하였고 오후에는 수업이 없는 선생님들이 나와서 작업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래도 다 끝낼 수 없었죠. 다음날 오전에도 아이들은 전날과 같은 방법으로 벼 탈곡에 참가하였습니다.

나락은 수북히 쌓여갔고, 볏단은 점점 줄어들어 4교시가 끝날 무렵, 마침내 마지막 볏단을 탈곡시키고,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농업 선생님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논농사 체험학습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얘들아, 이제 탈곡이 다 끝났는데, 지금까지 어떤 과정을 밟으며 왔노?"
"모내기, 벼 베기, 말리기, 뒤집기, 묶기, 탈곡하기."

아이들은 합창을 하였습니다.

"그래, 잘 아네. 그라모 이렇게 체험한 느낌이 어떻더노?"
"힘들었어요. 햇볕 때문에 짜증났어요. 농부님들이 고생을 많이 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 힘들다. 그러니 밥을 묵을 때 우째야 하노?"
"감사해야 해요."
"밥 남겨서 버리면 되나 안 되나?"
"안돼요."
"그래, 나락 껍질을 많이 벗겨낸 쌀을 백미하고 하는데, 흰 쌀이라는 뜻이지만, 사실 일백 백자 백미(百米)다. 이렇게 귀한 쌀을 우리가 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 알고 밥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농부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알겠제?"

▲ 나락을 다 떨어낸 짚단을 옮기는 아이들의 모습이 천진해 보입니다.
ⓒ 정일관
▲ 아이들이 없을 땐 선생님들만이라도 탈곡을 합니다.
ⓒ 정일관
아이들이 논을 다 빠져나간 후 선생님들은 큰 선풍기를 가져와서 겨와 쭉정이를 날리고 나락을 가려내었습니다. 풍구가 없어 선풍기로 대체한 것이지만 바람에 날려가는 쭉정이를 보며 다시 한 번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 일년 농사는 어떠했는고? 나는 지금 바람 앞에서 쭉정이인가? 아니면 속이 찬 알곡인가?

가을 하늘이 마냥 파랗습니다.

▲ 모과나무 아래로 보이는 벼 베는 아이들 모습이 정겹습니다.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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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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