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학'은 한국사회 공교육에서 문제의 소지가 되는 '사학'과 '종교'라는 두 가지 요소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두 가지의 의미가 처음부터 부정적이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부정적인 기능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사학의 전반적인 문제에다 종교의 문제까지 덧씌운 꼴이다.
나는 두 가지 가운데 '사학'의 문제가 우선 정리되면 '종교' 문제도 여기에 수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사학은 다른 어느 사회에서도 볼 수 없는 과대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중등교육의 절반 가까이, 대학교육의 80% 이상이 사학인데, 이러한 비율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다. 이는 국가나 지역 공동체가 자신이 할 일을 방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선의로 세운 사학, 그러나 후손들은...
한국의 사학은 조선시대 말기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문물이 유입하면서 생겨난 과도기적 산물이었다. 유교 이념을 가르치는 성균관 중심의 교육제도가 무너지고 그 자리를 왕족이나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들이 채웠는데 이것이 바로 사립학교의 시초다.
이후 뜻있는 독지가들도 민족교육을 표방하며 학교를 세웠다. 이들은 선의의 동기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후 많은 학교들이 대개 영리나 명예 등 불순한 동기로 설립된 것과는 대비되는 점이다.
하지만 창립자가 순수한 동기로 세웠다고 해도 대물림을 하는 동안 학교는 가업이 되어 생계수단, 축재도구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오늘날 몇몇 사학들은 대개 아들이나 부인, 다른 친인척 아니면 가까운 친지들이 총장이나 이사진 대부분을 차지한 채 전횡을 일삼고 있다. 민주주의 시대에도 학교는 여전히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사립학교들은 소수의 외부인사가 이사진에 들어오게 만든 개정 사립학교법조차도 한사코 반대하고 있다. 이는 학교들이 상업화, 권력화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재정과 운영 체제가 떳떳하고 투명하다면 그렇게까지 저항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 모든 문제는 교육의 공공성을 망각한 데서 발단한다. 학교교육은 국방·세금과 더불어 국민의 3대 의무에 속한다. 그것은 그 세 가지의 집행을 개인이나 사설시장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 없어서 대학 못가는 나라는 한국뿐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이후의 교육은 선택이고 사설기관이 맡아도 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무교육 기간 자체가 (적어도 고등학교까지는) 연장될 필요가 있고, 중등 이후 교육도 국가나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만큼 나라나 지역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때문에 많은 선진국에서는 대학교육까지 그 비용 대부분을 개인이 아닌 사회가 부담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영국을 제외하고) 대학교육도 무료나 마찬가지로 수학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비교적 등록금이 비싼 미국 대학들도 부모의 수입이 적으면 '필요를 기초로 하여(need-base)' 그만큼 보조해 주기 때문에 학비가 없어서 자격을 갖춘 학생이 교육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빈부 차이가 한국에서처럼 교육에 크게 반영되지 않는 것이다.
미국 사립대학 예산에서 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가장 비싼 축에 드는 하버드대도) 총예산의 1/4을 넘지 않는다. 유럽과 미국 교육의 장점을 살린 캐나다의 대학은 모두 공립이며 학교세입예산에서 등록금 비율은 20% 미만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재정을 등록금에 의존하는 한국 사립대학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바로 학생의 등록금에만 의존하는 재정체계에 한국 교육의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사립학교의 등록금은 매년 치솟아 국민소득 수준에서 볼 때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또 우리처럼 해마다 학생들이 등록금 투쟁을 벌이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서구 대학의 교양필수는 '세계종교'
사립학교들이 개정 사립학교법을 거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른바 '건학이념'을 실천,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종교를 내세운 사학들의 주장인데, 그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교훈' 정도의 덕목이라면 몰라도 사사로운 목표나 이념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공교육 정신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때문에 건학이념은 기득권 보존을 위한 하나의 허울에 불과하다. 설사 그런 것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교리적이거나 종파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가치관에 수렴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충효' 같은 일반화된 덕목도 그것이 유교전통의 유산이라면 재고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념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종교의 교리나 신앙도 교육과정에서 강제되거나 앞세워져서는 안 된다. 자유·평등·민주주의 같은 보편적인 가치가 아닌 학생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야 하는 사사로운 것이 교육과정에서 강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몇 해 전 채플의 강제성을 고발했던 대광고의 강의석씨는 이 부분을 바로잡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어떤 학교가 특정한 종교 예배나 신앙 과목을 필수로 두고 있다면 그것은 인종·종교·성별 등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헌법의 정신에도 배치되는 교육이다. 기독교 전통의 선진국, 특히 보수성이 강한 미국도 학교교육에서만큼은 종파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학교교육은 자신과 다른 종교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과목을 적극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그래서 대개 서구 대학들은 '세계종교'를 교양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는 한국의 대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강의다.
사실 우리나라와 같은 다종교 사회도 드물다. 하지만 올바른 종교관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는 교육을 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잘못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부모 세대의 종교관을 자녀들이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비판정신을 기를 수 있는 인문학교육이 필요하다.
신앙인이라면 학교 소유에 왜 집착하나
우리나라의 사학들은 그 소유주체가 개인이냐 집단이냐에 따라 다시 공공성에 차이가 생긴다. 집단일 때는 아무래도 예산·인사 등이 투명할 수밖에 없지만 개인 소유는 투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까지 문제가 됐던 사학들은 대부분 개인(족벌) 소유 사학이었다. 재정이나 인사 등에서 전횡될 소지를 항상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종교사학과 그에 속한 학생과 교사, 교수들은 신앙과 운영 면에서 이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참다운 신앙을 가졌다면 학교의 소유 여부에 그렇게 집착할까? 승가(공동체), 교회(회중)가 의미하는 것처럼 모든 종교의 참정신은 개인이 아닌 사회성, 집단성에 있다. 공유나 무소유야말로 바로 종교의 이상이다. 공교육도 공유와 욕망의 절제를 훈련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종교와 닮아 있다.
사회 발전을 위해 한 개인이 교육에 공헌한 의향이 있다면 재산을 지정한 학교에 기증, 보시하면 된다. 그러면 학교는 건물에 그의 이름을 붙인다든지 동상이라도 세워 그 공적을 새겨두고 길이 기억할 것이다. 지역사회와 졸업생도 두고두고 고마워 할 것이다.
유럽의 국가들, 캐나다, 호주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미국 같은 사회에서도 개인의 재산처럼 소유하는 '교주'가 있는 사학은 있을 수 없다. 또 신입생이 줄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며 교주가 자살하는 나라도 한국밖에 없다. 사유재산처럼 학교를 대물림하는 나라, 교주의 아들이 교장, 총장이 되고 또 다음 교주가 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사학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개인 사유화'에서 '집단(지역사회) 공유화'의 길로 가는 것이다. 국립화나 국유화가 최선의 길은 아니다. 책임 소재의 중앙집중은 효율성과 투명성을 떨어트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역공동체가 필요에 따라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지역 단위의 공유화가 최선이다. 학교는 주민 세금이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곳이다. 지역사회에 필요한 교육기관이 재정난을 겪고 있다면 그 '교주'가 자살하기 전에 지역사회가 인수(환수)해 운영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세계 어디에도 '한국식 사학'은 없다
공교육은 시장경제와는 다르다. 미국 등 시장경제에 충실한 국가들도 공교육에서는 철저하게 영리를 배제하고 있다. 학교재단은 '비영리' 단체로 분류해 기부금에 대해서는 세금공제 혜택을 주고 있다. 물론 우리도 그렇게 대접하지만 직간접으로 영리를 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세금공제의 특혜까지 받는 영리단체인 셈이다.
하루아침에 바꾸기 어렵다면 과도기적으로라도 공공성을 강화하는 길을 취해야 한다. 개정된 사학법은 이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교수·교직원·학생·동문, 지역사회가 참여하고 감시하는 장치는 더 필요하다.
과거 개선된 사학법을 사학단체들이 불법적으로 로비해 개악한 것이 이전의 사학법이라는 게 교수사회의 상식이었다. 한편 법개정 반대투쟁에서 종교사학을 소유한 종단의 교역자, 지도자들이 '건학이념'을 명분으로 적극 참여한 것도 사회의식 없이 종파적 이익에 급급한 우리 사회의 조직종교의 모습을 보여준, 씁쓸한 일이었다.
사립학교들은 등록금(특히 대학)과 정부지원(중등)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다. 그나마 그것조차 공정하고 투명하게 집행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규정된 재단 전입금은 대개 사실상 장부의 숫자에 가까운데, 믿을 만한 감시를 할 기구나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물의가 생기면 마지못해 하는 교육부 감사조차 면죄부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일부 학교에 불과하지만 관선이사 선임으로 가는 것도 말썽이 일어난 한참 뒤의 일일 경우가 많다. 관선이사가 파견된 경우 모두 족벌 사학이었고, 관선이사 체제로 간 학교들은 지금은 재정과 전체구조가 훨씬 나아진 상태로 건전하게 발전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그럼에도 일부 과거 사학 수장들은 아직도 끈질기게 '컴백'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학교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이익과 명예를 창출하는 '기업'이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미국의 명문 사학들도 특정 개인이 아니라 원래 신앙공동체나 지역사회가 창립한 것으로 철저히 투명하게 공공재단에 의해 운영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사학이 아니라 공립이나 마찬가지다. 그 어디에도 설립자가 모든 것을 휘두르는 '한국식 사학'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