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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30일, 출범 4년 7개월째를 맞은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에 2만 번째 진정이 제기됐습니다.
당시 인권위는 앞으로 "빈곤문제, 양극화, 시설생활자 등 소외계층의 인권문제에 역점을 둘 예정"이라며 "인권위 역할에 대해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이와 관련한 사건조사, 실태조사 및 정책개선 권고들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 후 들려오는 인권위 관련 소식들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인권위와 관련해 언론에서는 조영황 인권위원장 중도사퇴, 금품을 수수하고 변호사를 소개하는 등 브로커 행위를 한 침해구제 조사관 등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이는 인권위의 신뢰성에 의심이 갈 만한 일들로 제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테러리스트로 오인된 이주노동자, 5개월 동안 인권위 기다렸건만...
그런데 최근 저는 인권위의 인권침해 조사 과정에서 인권위의 인권감수성을 의심할 만한 소식을 또다시 들어야 했습니다.
지난 20일, 화성외국인보호소 내 특별면회실에서 5개월째 보호소에 갇혀 있는 인도네시아인 A.S.(1972년생)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동행한 네 명의 지인들과 함께 그간의 사정을 들으며 인권위 진정 관련 대목에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A.S.는 한국에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지난 2001년 입국한 사람입니다. 산업연수생으로 일하던 중 업체를 이탈한 A.S.는 미등록자로 지내던 2004년에는 산업재해를 당하여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절단되는 아픔을 겪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지내던 그가 지난 4월 출입국 단속을 피해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사망한 인도네시아인 누르 푸아드(Nur Fuad)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경찰이 발리 폭발사건과 연관된 테러리스트로 알고 수사 중인 두 명과 함께 사진을 찍혔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두 명을 수배하던 중 A.S.를 임의 연행했습니다. 그러나 수사 결과 테러리스트와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혐의가 벗겨졌지만, 미등록이주노동자라는 신분 때문에 A.S.는 곧바로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넘겨졌습니다. A.S.는 보호소에 갇혀 있는 동안 고향인 족자카르타에서 지진이 일어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이 완파돼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고 합니다.
A.S.는 테러리스트로 오인돼 잡혔다는 사실 때문에, 강제 출국하게 될 경우 본국에서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경찰 연행 과정의 부당성을 들어 인권위에 진정했고, 인권위 조사 결과를 기다린 지 5개월째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호소에 갇혀 있는 동안 산재 관련한 재요양신청, 받지 못한 퇴직금 문제 등도 해결하길 원했다고 했습니다.
보호소에 있는 동안, 심신이 많이 쇠약해진 A.S.는 하루빨리 보호소에서 나오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인권위 조사관이 찾아온 것은 우리가 방문했던 그 주였습니다. 조사 결과를 어떻게 기대하고 있는지 A.S.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나왔습니다. 인권위 조사관의 조사에 통역이 배석하지 않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였고, 그들이 무슨 의도로 질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A.S.는 "삼년 동안 연수생, 그 다음은 산재, 말 많이 안 배웠어요"라는 말로 인권위 조사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동안 인권위는 이주노동자들과 관련해 법무부 출입국 관리부서의 무분별한 단속 관행이나, 외국인보호소 내 인권개선을 위한 진정 사건을 여러 차례 조사해 왔고, 관련 권고 조치도 내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A.S.가 5개월 동안 인권위 조사관을 기다렸고, 정작 조사 과정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해 줄 통역이 없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유감스러웠습니다.
조사를 담당했던 국가인권위 침해조사3팀 담당자에게 연락해 봤습니다.
"A.S. 관련해서는 제가 알기에는 7월엔가 접수를 받았습니다. 담당조사관이 8월에 부서를 옮기면서 조사가 늦어졌고, 팀장인 제가 갔습니다. 내용을 알고 갔고, 전화해 본 결과 한국어를 잘하는 것 같아 통역을 배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했는데, 진정사건에 대해서는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조사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관련 단체에서 통역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 인권위에는 이주노동자 진정 조사와 관련해 통역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일선 경찰에서도 외국인에 대한 심문 조사를 할 때는 통역을 배석하도록 관련지침을 마련해 운영하고 있는 점에 비춰보면 의외였습니다.
"삼년 동안 연수생, 그 다음은 산재, 말 많이 안 배웠어요"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고, 그들에 대한 기사와 소설을 써온 데위 앙그라에니(Dewi Anggraeni)는 <꿈을 찾는 사람들(Dreamseekers, 2006) - 아시아지역 가사노동자로서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저자입니다.
데위 앙그라에니는 많은 이주노동자들과 고용주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고용주들한테 전해들은 바를 자신의 저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많은 피고용인들이 'yes'라고 대답할 때, 그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정확히 이해하고 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바 있다."
데위 앙그라에니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공장이나 일반 생활 현장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의사소통 수준은 가능하지만 유창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일차적으로 언어소통상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늘 경험하는 현장이 아닌 경찰서, 보호시설, 병원 등 생소한 현장에서는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고, 의도하지 않은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금년도 인권위 발표에 따르면 인권위에 접수된 진정사건 중 약 80%가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침해'였고, 그 중 구금시설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 진정이 7187건(45%), 경찰에 의한 인권침해 진정이 3439건(21.5%)입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인권위가 구금시설과 경찰에 의한 인권침해 사실 조사에서 충분한 노하우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할 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A.S.의 일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인권위의 인권감수성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찰이나 외국인보호소 측에서 '보호 중인 사람들은 대개 한국에 체류한 지 오래됐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친구들이 말을 대신해 주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면, 아직 수준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숱한 진정과 인권위의 권고를 통해 '평등권과 사회권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자평하는 인권위에서 이주노동자 진정 사건을 다루면서 통역을 배석하지 않은 것은, '또 다른 차별'의 한 형태를 스스로 행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권위가 또 하나의 관료 조직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건이지만, 실명을 기재하지 않은 점 양해 바랍니다.
외국인보호소 역시 외국인통역과 관련한 명문 규정이 없이 영어나 한국어가 가능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 상담을 받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