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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박성신씨.
어머니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박성신씨. ⓒ 김은희
당신 몸의 일부분으로 여겼던 아이들을 가슴에 담고 은퇴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 자랑스럽고 한편으로는 무척 떨립니다. 짧지만은 않았던 시간들을 되짚어봅니다.

처음 어머니께서 한 아이를 안고 집으로 오셨을 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납니다. 막내로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었지만 항상 동생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때라 아이가 온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하지만, 세살 정도 되었다던 그 아이가 영양실조로 너무 말라 걷지도 못하고 기운 없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어머니께서 여러 가지 보양식과 정성으로 보살피셨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애교도 많고 잘 따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듯이,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입양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 서운해했지만 어머니께서는 더 힘들어 하셨습니다. 얼마나 우셨는지 눈이 퉁퉁 붓고 몸살을 앓으셨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족 모두 "그렇게 힘든데 그만 두세요"라고 말렸지만 먼저 입양 간 아이를 잊기 위해 새로운 아이를 돌보는 게 더 위안이 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시작한 일인데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어머니의 손을 거쳐 갔습니다. 그 중에는 머리에 물이 차서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던 대식이, 입천장과 코가 뚫려 우유를 먹을 때도 항상 조심스러웠던 아이, 항문이 없어 옆구리로 배설할 수밖에 없었던 문식이, 뼈에 결핵이 걸려 물리치료를 다녀야 했던 수정이, 거의 3년간 심장이 좋지 않아 수술을 여러 차례 했던 미애. 그 외에도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갑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항상 어딘가 불편한 아이들만 데려오시기에 처음에 홀트에는 모두 장애아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가끔 양육 점검날 어머니를 따라 홀트에 가보니 예쁜 아이들도 많아 하루는 어린 마음에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엄마, 우리 집에는 왜 항상 아픈 애들만 와? 우리도 예쁜 아기 키우자."

어머니께서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를 돌보는데 예쁜 애면 어떻고 장애아면 어떠니? 친부모의 정도 못 받고 자라는 아이를 키우기 힘들다고 거절하면 누가 그 아이들을 돌보겠니? 나는 잠깐이지만, 양부모가 되는 사람들은 그 아이의 장애를 감수하고 평생을 뒷바라지하며 함께 할 텐데…. 그거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좋은 위탁모가 될게요"원종임씨와 딸 박성신씨.
"어머니의 뒤를 이어 좋은 위탁모가 될게요"
원종임씨와 딸 박성신씨.
ⓒ 김은희
그 때는 잘 몰랐지만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고 훌륭한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를 오랫동안 업으셔서 그런지, 작년에는 그동안 불편해하시던 다리를 수술받으셨습니다. 가끔씩 돌보았던 아이들의 사진과 소식이 담긴 편지를 살펴보시는 것이 어머니의 낙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아쉬움이 남으셨는지 '너도 아이를 돌보는 게 어떻겠느냐'던 어머니의 말씀에 저도 위탁모 봉사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옆에서 어머니를 지켜보았고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기에 많이 망설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머니 못지않게 잘하고 싶은 마음과 욕심이 생깁니다. 저도 어머니처럼 좋은 위탁모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어머니 수고 많으셨어요! 사랑합니다!

덧붙이는 글 | 김은희 기자는 홀트아동복지회( www.holt.or.kr)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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