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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
겉표지 ⓒ 한국문화사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응큼하다’는 지적은 언어와 사고, 그리고 언어와 민족의 관계를 직·간접적으로 함의한다. 물론 학문적으로 명확하게 논증된 바 없지만 언어 구조와 사고, 나아가 민족성까지 추론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표현이라 하겠다.

<추론의 화용론>(이성범·한국문화사)은 언어와 추론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를 담고 있는 언어학 관련 전공서적이라 할 수 있다. 언어 연구의 다분히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틀을 넘어서 인간 사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추론을 자연언어와 관련시킴으로써 일상언어의 풍부한 질감을 살려낸 연구서라 할 수 있다.

추리 소설의 ‘추리’는 ‘추론’과 다른가?

추론은 추리소설에 사용되는 추리와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즉 미루어 짐작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의 한 형태이다. 다만 보다 논리적이고 근거 제시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추론이 심리학이나 언어학, 그리고 논리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추론이란 미리 알고 있는 하나 또는 둘 이상의 명제 또는 판단으로부터 새로운 하나의 명제 또는 판단을 이끌어 내는 것을 말한다. 이 때 미리 알고 있는 명제 또는 판단을 전제라 하고 새로 얻어낸 명제 또는 판단을 추론의 결론이라 한다.”(p30)

즉 전통 논리학에서의 추론은 보편타당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추론에 관여되는 주체, 객체, 그리고 시·공간에 관계없이 성립해야 함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자연언어에서는 주체와 객체, 그리고 시·공간에 따른 수많은 매개변수의 영향으로 추론의 지향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전통 논리학에서의 추론과의 차이점이다.

<추론의 화용론>에서는 바로 자연언어에서의 추론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단어나 문장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언어의 결을 보다 잘 살릴 수 있는 담화, 곧 문장 이상의 언어 단위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언어에서 왜 추론이 중요할까?

논리학에서 대다수 다루어지는 추론은 형식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자연언어의 결을 거의 완전히 배제한 체 극히 형식논리에 입각한 완고한 추론 체계를 다루기 때문에 현실의 언어 논리에 적용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하지만 형식논리라 할 지라도, 거기에서 다루고 있는 추론은 인간 사유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쉽사리 도외시 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학이 여전히 모든 학문, 특히 인문학에서 중요한 기초 영역으로 다루어진다.

이는 또한 자연언어가 순수하게 학문외적 관심사에 머문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기왕 학문의 영역으로 편입되려면 최소한의 기본적인 논리구조와 형식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논리학의 기본 개념과 명제들을 받아들이고 이를 응용해야 하는 관계를 가진다.

여기에 바로 ‘추론’이 부각되는 것이다. 자연언어나 논리학에서 추론 혹은 추리는 대단히 중요한 인간 사고의 영역으로 다루어진다. 인간은 단편적이고 일의적인 사고의 수준을 넘어 총체적이고 다의적인 수준이 가능한데, 이는 곧 인간의 사고가 복잡 미묘하다는 것이다. 이 복잡 미묘한 것은 다름 아닌 추론을 통한 상징영역에로의 사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식논리와 문장 중심 논리에 머무르는 논리학은 형식적·수리적 사고의 치밀함과 복잡성에 이르는 완결성을 보여주지만 자연언어가 가지는 상징의 영역까지 접근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여기에 바로 자연언어에서 추론의 역할에 대한 탐구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의 논리

해묵은 논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어와 사고의 우선 순위 문제는 항상 언어 연구자들에게 있어 왔다. 뿐만 아니라 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철학자나 심리학자에게도 이 문제는 항상 관심거리가 되어 왔다. 특히 언어에 따른 사고방식의 문제는 곧잘 민족성의 문제로까지 논의가 이어져 새삼 우리에게 흥미로운 문제의식을 던져주기도 한다.

“한국어나 일본어 같은 언어들은 문장에서 중요한 요소인 문장의 끝 부분에 온다. 이는 이들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민족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중략) 즉 이런 언어를 말하는 민족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응큼하며 끈질긴 면이 있는 반면, 중요한 요소를 일찍 밝히는 영어를 말하는 민족은 감추는 것이 없는 솔직 담백한 민족성이 언어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p400)

언어와 사고의 문제는 최근의 공용어 논쟁에도 곧잘 찬반의 주장을 대변하는 주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20세기말부터 한국에서 불기 시작한 영어공용어 논쟁의 기본도 실상은 언어를 의사소통의 도구로 보느냐 아니면 언어가 사고와 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존재이냐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본다.”(p424)

곧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이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이며, 사고와 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존재이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커다란 타격을 입을 수 있음을 경계하여 공용어의 폐해를 지적하는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추론의 화용론>은 제목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추론이라는 사고의 한 부문과 언어학에서 최근 떠오르고 있는 문장 이상의 단위를 다루는 화용론을 결합해서 이론과 실제를 골고루 다루고 있다. 특히 추론이라는 인간 사고의 정수리를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자연언어를 통해 형식화해가고 이론화 해 가는 논리가 의미 있고 가치 있어 보인다.

인간의 신비를 푸는 하나의 열쇠가 두뇌라면 그 두뇌 사고 작용의 최정점이 추론이며, 그 추론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형식화할 수 있는 도구가 언어이다. 그 점에서 <추론의 화용론>은 언어와 사고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주요한 부분들을 잘 다루어 주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일독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추론의 화용론

이성범 지음, 한국문화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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