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엘먼의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는 18세기의 중국 청대의 지식인 사회를 철저히 분석해 낸 역사 관련 서적이다. 책은 ‘고증학이 청대의 사상 통제 때문에 생겨난 일시적 학문’이라는 종래의 시각에서 탈피해, 중국의 유교가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시대 상황에 관한 자세한 분석을 담고 있다.
웬만한 사전 두께인 이 책을 읽는 며칠 내내, 몇몇 학자들의 태도가 심히 불쾌하게 느껴졌다(저자인 벤자민 엘먼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서술체가 거슬린다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성리학을 정답이라 믿고 있는 학자들은 타 학문을 경계하고 무시하며 자신들의 의견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또한 고증학을 철저히 연구, 분석했던 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논리와 사상을 가지고 성리학을 비판하였다.
세상에 상충되는 학문은 없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모든 분야가 끈으로 이어져 있고, 그렇기에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할 것도, 타인의 학문을 배척하고 볼 것도 아닌데 많이 배웠다는 유명 지식인들이 그러한 생각으로 학문 수양에 정진했다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불교의 출세간성, 반사회성, 비윤리성 등을 공허하다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학문을 참된 것이라고 정당화한 성리학자들은 과연 불교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고 있었을까?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정도전이 <불씨잡변> <심기리편> 등을 저술하여 불교신앙의 허구성, 미신성 및 불교이론 자체의 부당성을 지적했던 것도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그러한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학문만이 옳다 말하면서, 성리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게 아닐까.
유학에서 분류되는 예의 종류는 300~3000여종 정도로 세분화되어 있다고 책에 쓰여 있다. 성리학자들은 예학을 연구하여 각각의 상황에 합당한 인간의 행위 규범을 제정, 준수하고자 하였다. 불교를 비판하였던 성리학은 예를 통하여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형식화시킴으로써 성리학적 규범을 제시하였다.
특히 성리학이 관학이 된 이후로 예의 정립과 실천은 정책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예학’ 관련 구절들을 읽는 내내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만의 예의범절을 주창하였던 성리학자들이 가엾게 여겨졌다. 예의범절을 익히고, 지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들었을까.
이처럼 예의에 죽고 예의에 살던 성리학자들은 후에 양명학에서 주장하는 양지와 지행합일 등의 학설을 또 한 번 비판한다. 이어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들은 천주교의 우주관, 인생관, 윤리관이 국기를 흔드는 오랑캐 또는 금수의 사상이라고 배척하고 유교의 삼강오륜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 결과로 우리나라는 먼저 서구에 개항했던 일본의 지배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자신이 믿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며, 그 이외의 사상은‘오랑캐’, ‘이단’으로 치부하는 학자들에게서 과연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
1999년 김경일씨가 써 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의 생활에 자연스레 깃들어 있는 유교성을 끄집어내 비판하고, ‘우리 안에 살고 있는 공자를 죽이자’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던 저자의 시선이 참으로 통쾌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뒤집히는 순간, 진실은 사라지고 정답도 오답이 되어버린다.
<공자가 죽어야...>는 당시 베스트셀러 부문에 이름을 올리며 대중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저자와 출판사 대표는 ‘명예훼손’ 등의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재단법인 성균관의 유림들이 ‘공자와 유교에 대한 모멸감을 줬다’며 법의 판결을 바랐던 것이다. 결국 대법원에서는 ‘표현의 자유’라며 원고패소판결을 했지만 말이다.
김경일은 이 책에서 주로 우리나라의 병폐를 꼬집었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뿐이 아니라 엘먼의 책에서 거명된 학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소위 ‘배웠다’하는 사람들이 더욱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것이다.
4장 ‘강남 학자들의 전문직업화’ 부분을 살펴보면 ‘청대에는 상업자본이 지식인의 위치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장벽(예를 들면 귀족 같은)이 없었기 때문에 지식인과 상인의 구별이 유동적 이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뒷부분을 읽다 보니 다만 유동적이었을 뿐, 그 때의 지식 체계도 '있는 사람’ 위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씁쓸해졌다. 마치 지금의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사실상 없는 사람은 마음껏 배우지도, 법의 보호를 받지도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고증학 관련 기록을 남길 시에도 문사가문 출신이 아닌 이들의 출신지를 숨겼던 당시의 풍토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고증학자들의 출신을 분석한 표 중에서 문사 가문도 상인의 신분으로 쇠락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용의 사례를 보면, 당시 청대 사회가 그 이전만큼 태생적 신분에 엄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강남에서 나타난 염상 가문들은 부의 달성 및 학술상의 성취를 이룩하였다는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사업을 해서 흥한 부모들은 자식들을 철저히 공부시키고,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고액과외를 시키는 등의 투자를 해서, 자식들을 엘리트로 키워내는 것이다.
얼마 전 ‘민족 사관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경우, 부모의 소득이 월 700만원이 넘는 경우가 35%에 달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청대의 학술이 번영을 꾀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자본의 힘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고증학자들에 대한 ‘후원’ 부분을 읽어 내려가면서 관직으로 진출하지 못한(또는 이를 사양한) 학자들이 나의 예상보다 훨씬 더 우대를 받으며 학문에 정진했다는 사실을 알고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부와 재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고학생들의 뒷바라지를 한다면 나라의 앞날이 더욱 밝아지지 않을까?
금석문을 통하여 고대의 참모습을 볼 수 있고, 자료의 신뢰성과 입증 가능성이 높게 평가되었던 탓에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는 금석학이 무궁히 발전하였다고 한다. 금석학이 발달했기에 과거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고, 검증된 과거사와 관련된 자료를 통해 고증학은 또 한 번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이너의 감성을 지닌 나여서인지, 족보와 연보관련 부분을 읽으면서는 고증학의 발전으로 인해 신분제 피라미드의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 받았을 모습이 절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족보의 경우 거의 대부분 청대 강남지역, 특히 강남의 도시 지역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족보와 관련된 비리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시조와 비조, 중시조 등을 따지느라고 고증학자들은 얼마나 긴 밤을 지새웠을까.
고증학이 실용적이고, 인간의 삶에 많은 도움이 되는 학문이라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큰 뿌리를 보면 유학의 한 학파일 뿐인 것이다. 한학을 중시하고, 신분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고증학자들. 고증학은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많은 실학자들을 낳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열린 생각을 가지고 학문에 임했을 지에는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유학에 관한, 성리학과 고증학에 관한 다양한 책을 읽고 그들의 사상에 내 마음이 움직이게 되면 조금 넓은 시각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이든 형이하학적이든, 모든 학문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하고 수양하는 개개인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른 의미로 와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옳다고 믿는 학설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이고, 지금 해석했다 여긴 글자가 사실 이전사람들에게는 사실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그래서 성리학이든 고증학이든 100% 정답인 학문은 없다. 내 생각으로는 학문을 함으로써 문화와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고, 자기 자신의 심적 여유와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다. 하지만 어디 학자들에게는 그렇겠는가. 어쨌든 그들이 남긴 여러 자료와 책으로 인해 나는 이렇게 사학을 공부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