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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포트 타워와 해양 박물관.
고베 포트 타워와 해양 박물관. ⓒ 박경
느지막이 일어나서 한큐전철에 몸을 싣고 고베(神戶)로 향했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들. 그토록 빠르게 멀어져 가는 시간들. 어느새 여행 마지막 날이다. 고베는 야경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아이 핑계로 피곤한 밤길은 포기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 가족여행은 점점 아이의 눈높이를 따라가고 있다.

어른들도 신나는 놀이동산 USJ

첫 해외여행 때, 어떻게 아이는 좀 떼어놓고 가볼까 은밀히 고민했었지만, 이제 아이가 누릴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려하게 된다. 이번엔 팍팍 인심을 써서, 전 같으면 어림도 없을 놀이동산을 끼워 넣었다.

지난번에 도쿄를 다녀왔을 때, 사람들은 아이에게 디즈니랜드도 갔다 왔냐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디즈니랜드가 도쿄에 있었다는 걸 여행을 다녀와서 비로소 알게 된 아이 앞에서, 아주 조금 찔렸었다. 아이의 호기심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우리는 아예 디즈니랜드 존재 자체를 은폐했었다.

이번엔 그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 오사카의 USJ(유니버셜 스튜디오 재팬)를 큰 맘먹고 집어넣었다. 여행을 해본 사람들은 알리라, 놀이동산 하나 끼워 넣는 일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를. 요리조리 눈치 보며 빼낸 휴가에서 적어도 하루는 족히 할애해야 하는 놀이동산, 알뜰살뜰 그러모은 여행경비에서 뭉칫돈이 쑤욱 빠지는 걸 감내해야 하는 놀이동산 아니던가.

웬만한 일에는 웃음도 나지 않고, 타는 일에 재미를 느끼기보다 어지러움을 느끼는 나이가 되고 보니, 놀이동산은 이제는 흥미로운 곳이 아니다. 따라서, 할리우드 영화를 테마로 만든 각종 어트랙션이 가득한 USJ를 간다는 일은, 순전히 아이를 위한, 부모로서의 눈물겨운 희생정신의 결정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희생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내가 더 신나게 놀았다는 걸 솔직하게 밝혀야겠다.

미국의 거리 풍경을 재현한 USJ의 한 부분.
미국의 거리 풍경을 재현한 USJ의 한 부분. ⓒ 박경
USJ는 할리우드, 뉴욕, 샌프란시스코, 애머티 빌리지, 쥐라식 파크 등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애머티 빌리지'에서는 배를 타고 인공의 바다로 나가 '죠스'를 만나는 스릴을 경험하게 되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백 투 더 퓨처'를 만끽할 수 있다.

뭐니뭐니해도 우리 가족이 제일 신나했던 건 '뉴욕'의 '어메이징 어드벤쳐 오브 스파이더맨 더 라이드'였다. 순대처럼 구불구불한 줄을 1시간 30분이나 서서 기다린 끝에 맛본 스파이더맨은 다시 1시간 30분을 더 기다린다 해도 또다시 타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USJ의 어트랙션은 '탄다'기 보다 '경험한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뉴욕의 빌딩 사이를 누비면서 고층에서 떨어지는 아슬아슬함을 만끽하고 건물과 건물을 넘나들며 스파이더맨이 된 기분에 흠뻑 취해서 얼얼해질 정도이다. 하지만 나는 특수안경을 통해 3D 입체화면에 빠져들었을 뿐이고, 내가 탄 스쿠프호는 정신없이 흔들리기만 했을 뿐인 것을.

나는 아직도 남편에게 멍청한 질문을 던진다. 여보, 근데 그때 우리가 탄 스쿠프호는 정말로 하나도 앞으로 안 나간 거야? 그냥 흔들리기만 한 거 맞지?

스파이더맨을 만끽하고 나오면, 클라이맥스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서 판매하고 있다. 그 사진 속에서, 넋 나간 우리 가족의 모습은 또 어찌나 바보스러운지. 아마도 마천루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듯 떨어지는 순간쯤 되리라. 입은 헤벌리고 오줌 마려운 표정이다. 더 우스운 것은, 머리가 휘날리거나 바람에 옷이 젖혀지는 아무런 흔적이 없는데도 표정만은 공포와 스릴이 짬뽕 되어 묘하게 일그러져 있다는 것.

이거, 차세대 놀이기구로 아주 제격이다 싶다. 보기에도 아찔한 놀이기구들처럼 불안하지도 않다. 요즘 놀이동산의 잦은 사고처럼 크게 위험하지도 않다. 어지럽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재미나 스릴은 몇 곱절 더하다. 어른도 혼이 쏙 빠지도록 신나고 재미있다. 어느새 나는, 다음 어트랙션으로 가기 위해 아이 손목을 잡아끌고 열심히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스파이더맨이 되어 벽을 타고 붕붕 날아다니는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어린 시절 하루종일 수영하고 잠자리에 들 때 아직도 물속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추위를 가르고 스케이트를 타고난 밤이면 이부자리가 아직도 얼음판인 듯 다리에 힘이 들어가던 것처럼, 어른이 되어 모처럼 그런 기분을 만끽했다.

USJ의 가장 인기 있는 어트랙션 '스파이더맨'
USJ의 가장 인기 있는 어트랙션 '스파이더맨' ⓒ 박경
USJ의 '워터월드'. 물이 솟구치고 불이 붙고 다이빙을 하고. 영화의 장면을 실감나게 공연(?)한다.
USJ의 '워터월드'. 물이 솟구치고 불이 붙고 다이빙을 하고. 영화의 장면을 실감나게 공연(?)한다. ⓒ 박경
낮에 찾은 밤의 도시

스르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바로 전날의 USJ 기억을 더듬고 있자니, 어느새 기차는 고베에 이르렀다. 오사카와 더불어 항구도시로 유명한 고베의 역사는 아주 깊다. 일본이 서양과 교류하기 전, 우리나라나 중국을 통해 문물을 수입하던 시절, 일본 최대의 항구 역할을 한 게 바로 고베항이었다. 가까이 위치한 오사카와 비교하자면, 오사카는 국내항의 성격이 강하고 고베는 각종 외항 선박이 드나드는 국제항의 성격이 강하다고 가이드북은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고베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건 1995년의 한신 대지진이 아닌가 싶다. 리히터 7.3의 강도 높은 지진으로 인해 엿가락처럼 휘어버린 한신고속도로의 모습에 오싹했던 걸 기억한다.

그 당시 40%가 가라앉았었다는 메리켄 파크를 찾았다. '지진 발생 직후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여 처참하게 파괴된 부둣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하니, 아이에게도 좋은 교육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나 멀쩡하게 복구된 고가도로와 평화로운 부두는 별다른 감회를 전해주지 못했다. 더구나 지진에 파괴된 모습을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곳은, 주민이 6000명 넘게 숨지고 빌딩이나 가옥이 51만여 채나 붕괴되었다는 엄청난 재앙을 가늠케 하기에는 그 보존 규모가 아쉽게도 너무 작았다.

그렇다 해도 당시 지진 경험자의 정신적 후유증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걸 보면, 지진이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었는지 감히 짐작해 본다.

지진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지진 메모리얼 파크'
지진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지진 메모리얼 파크' ⓒ 박경
지금은 평화롭기만 한 메리켄 파크.
지금은 평화롭기만 한 메리켄 파크. ⓒ 박경
그렇게 낮의 상처와 흔적을 씻어내기 위해서일까. 고베는 밤의 도시, 천만불짜리 야경의 도시로 더욱 유명하다. 메리켄 파크를 돌아서 걷노라면 저 멀리에서, 밤에 더 아름답다는, 빨간 포트 타워와 하얀 해양 박물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밤이면 더욱 화려하게 피어난다는데, 별을 뿌려놓은 듯 빛의 물결이 이어진다는데, 낮에 찾아온 여행자에게 별다른 감흥을 선사할 리 없다. 세계 각국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과 각종 캐릭터 상품들이 넘쳐나는 쇼핑타운 '모자이크'도 밤이 되어야 비로소 활기를 되찾을 듯싶은 곳이다.

횃불 같은 고베 타워에 붉은 등불이 켜지고 파도 같은 해양 박물관이 푸른빛으로 밀려오는 걸, 모자이크 데크에 앉아 짙은 커피 향 맡으며 마주할 수 있다면 훨씬 더 멋질 텐데. 시나브로 밤이 내려앉고 불빛들이 피어오르는 걸 마주했었더라면. 여행 마지막 밤을 그렇게 달랠 수 있었다면.

하지만 커피 향은 날려 버리고 냉수 먹고 속 차려야 하는 게 아이 딸린 부모의 현실. 여드레 동안의 더운 여름 여행에 지쳐, 행여 귀국하는 날 늦잠이라도 자 비행기 놓칠까 노심초사, 부랴부랴 숙소로 돌아가 짐을 꾸리고 아이부터 재워야 했다.

여기에 불이 켜지면 천만 불 짜리라고? 아무래도 과장인 듯.
여기에 불이 켜지면 천만 불 짜리라고? 아무래도 과장인 듯. ⓒ 박경
모자이크의 아기자기한 상점들.
모자이크의 아기자기한 상점들. ⓒ 박경
모자이크는 작은 유원지와 연결된다.
모자이크는 작은 유원지와 연결된다. ⓒ 박경
여행지는 나의 쓰레기장

결국 고베에서 천만 불짜리 야경을 못 보았으니 천만 불을 버린 셈. 졸지에 간댕이 큰 가족이 되어 버렸다. 이제 우리 가족은, '야경' 따위는 굳이 챙기지 않기로 했다. 그냥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도톤보리 야경 같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리품 팔며 높은 곳을 찾았다가 밤늦게 숙소로 돌아오는 일은 아이 딸린 가족에게는 피곤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버릴 것이 어디 야경뿐이던가. 여행을 하다 보면 버리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계획을 세우면서부터 버리기는 시작된다. 가고 보고 먹을 것은 너무나 많은데, 시간은 너무나 적다. 버릴 수밖에 없다. 가지를 쳐내듯 자르고 포기하고, 욕심을 버린다.

짐을 싸는 것도 마찬가지. 이것저것 필요하다 싶은 걸 다 쑤셔 넣었다가 가방을 들어보고는 다시 하나씩 도로 꺼내게 된다. 여행지에서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게 짐을 덜어내고, 욕심을 덜어낸다.

마지막으로, 가방 구석진 곳에 빈자리를 마련해 둔다. 그곳은 내가 여행 가서 정말로 버려야 할 것을 위한 자리. 나를 속인 삶에 대한 분노, 나를 할퀸 자들에 대한 증오, 선택만을 강요한 인정머리 없던 유혹들, 여름을 건너뛰고 맞이해야 하는 가을의 쓸쓸함, 꼼짝없이 닥쳐버린 마흔의 서러움 같은 것들….

여행을 갈 때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버리고 돌아올 수 있다면. 내 여행지는 내가 버린 쓰레기들로 산이 되어 갈지도 모르겠다. 말간 모습으로 여행에서 돌아온다 해도, 비루한 일상 속에서 나는 또다시 쓰레기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그럼 그 쓰레기를 짊어지고 또다시 여행을 떠나겠지. 언젠가 나의 그 쓰레기 산이 등불처럼 환하게 빛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쓰레기 산조차 넓은 가슴으로 품을 날들이 올 수 있을까.

그때 비로소 난 기나긴 여행을 멈출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일본 간사이 지역 여행기를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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